[김강임의 제주오름기행] 오백장군 눈물 흐르는 한라산 영실

▲ 한라산 영실 선작지왓까지 안개가 자욱합니다 ⓒ김강임
한라산 영실은 기암괴석이 진수입니다. 더욱이 한라산의 봄은 기암괴석 틈새에 피어나는 연분홍 철쭉꽃이 환상이지요. 사람들은 한라산 영실을 '신들이 사는 정원'이라 부릅니다. 신령들이 사는 나라 한라산 영실. 하지만 영실의 기암괴석과 철쭉꽃은 알고 보면 애절한 이야기가 담겨 있지요.

# 안개 자욱한 날 한라산 영실로

▲ 안개낀 날, 해발 1280m 영실 입구는 아직 밤입니다. ⓒ김강임
6월 8일 아침, 눈을 뜨니 창밖에 비가 내리더군요. 이맘 때면 절정에 달하는 한라산 철쭉 기행을 계획했는데 비가 내리니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니, 남편과 모처럼 산행 약속했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니 허탈했지요.

"갈까? 말까!"

망설임 끝에 우비를 챙기고 한라산 영실로 향했습니다. 초록이 짙게 드리워진 99번도로(1100도로)는 어둠이 깔려 있더군요. 짙은 안개까지 몰려왔습니다. 99번 도로는 안개가 많은 지역이기도 하지요.

아침 6시 30분, 해발 1280m 영실 입구는 한산했습니다. 비와 안개, 어둠이 걷히지 않은 산은 적막하기까지 했습니다. 한라산에서 키가 큰 해송도 키 작은 조릿대도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한 발짝 앞서가던 남편이 안개 속에서 뒤를 돌아다 보더군요. 행여 안개 속에 내가 묻힐까 걱정이 되나 봅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오르는 한라산이지만 늘 새롭습니다. 더욱이 안개 자욱한 날의 산행은 나름대로 운치가 있더군요. 그리고 스토리를 엮어냅니다.

▲ 돌무덤이 등산로를 안내한다. ⓒ김강임
전날 밤 한라산에 비가 많이 내렸나 봅니다. 어둠 속 계곡에서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니 말입니다. 계곡 아래에는 누군가 쌓아 올린 돌무덤이 침묵을 지킵니다. 돌무덤은 짙게 깔린 안개길, 어쩌면 우리가 걷는 산길을 인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해발1500고지 ⓒ김강임
#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전설

해발 1300고지부터 급경사, 계단을 오르며 숨을 헉헉댔습니다. 안개까지 먹어 버렸지요. 이렇게 새벽 안개를 마셔본 것이 처음인 것 같습니다. 이때까지도 산은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두컴컴한 등산로에서 벌써 하산하는 이도 있더군요. "몇 시에 출발했습니까?"라는 질문에 "새벽 4시요!"라고 말합니다. 산이 아무리 좋다고 새벽 4시에 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해발 1500고지, 안내표지석 앞에 앉았습니다. 사과와 초콜릿의 달짝지근한 맛에 안개까지 삼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표지석도 오늘따라 새삼스러워 보입니다. 이쯤에서 앞을 내다보면 각양각색의 기암괴석이 나타날 테지만, 안개에 가려져 있습니다. 제주의 오름도 볼 수가 없습니다.

안개가 짙게 낀 걸 보니 설문대할망이 화가 난 모양입니다. 한라산 영실은 설문대할망과 오백장군의 얽힌 이야기가 있지요. 옛날에 설문대 할망이 살았는데 아들을 500명이나 두었다 합니다. 설문대할망은 가난하여 500명 자식에게 먹일 죽을 쑤다가 그만 가마솥에 빠졌다 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백장군(자식들)은 그 죽을 맛있게 먹었겠지요. 그 중 막내아들이 솥에서 뼈를 발견, 비통하게 여긴 나머지 형제들과 이별하여 떠났다지요. 그게 바로 차귀도라네요. 그리고 오백장군 중 막내아들을 제외한 499명은 한라산 기암괴석이 되었다 합니다.

▲ 한라산 철쭉은 오백장군 눈물 ⓒ김강임
# 설문대할망 화났다

그렇기에 봄이면 바위 틈을 빼꼭히 메우는 철쭉꽃은 오백장군의 눈물이라 합니다. 그리고  한라산에 안개가 끼는 날은 설문대할망이 화가 난 것입니다. 물론 한라산에서 야호- 소리를 지르면 안개가 몰려온다고도 하지요. 그러니 안개가 짙게 낀 걸 보니 설문대할망이 화가 난 모양입니다.

드디어 1600고지에 이르렀습니다. 이쯤해서 보일 병풍바위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안개비까지 내리니 몸에서는 땀이 납니다. 1600고지 등산로에는 철쭉이 만개했습니다. 구상나무 숲에도 철쭉이 핏빛으로 물들었습니다. 

▲ 조릿대와 어우러진 철쭉꽃 ⓒ김강임
▲ 핏빛으로 물들은 한라산 ⓒ김강임
오백장군이 회한의 눈물을 흘리나 봅니다. 설문대할망이 화가 났으니 말이지요. 구상나무 숲을 지나 선작지왓에 이르렀습니다. 누군가는 이곳을 동산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이곳을 평야라 부릅니다. 그런데 평야면 어떻고 동산이면 어떻습니까? 조릿대가 숲을 이룬 선작지왓까지 오백장군의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 오백장군 눈물 한폭의 그림 되어... ⓒ김강임
# 오백장군 눈물 뚝뚝 떨어지는데...

오백장군 눈물은 윗세오름 광장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날 따라 까마귀도 울지 않습니다. 오백장군이 우니 차마 까마귀가 울겠습니까? 윗세오름 광장에 앉아 안개로 컬컬해진 목을 커피로 축였습니다.

▲ 하산길에 만난 한라산 자생식물들 ⓒ김강임
드디어 하산, 서서히 안개가 걷혔습니다. 드디어 만물이 깨어납니다. 하얗게 꽃을 핀 보리수나무도 고개를 듭니다. 안개에 젖은 윤노리 나무도 물방울을 털고 일어납니다. 드디어 설문대할망의 화가 풀린 걸까요?

▲ 안개 걷히자, 꽃분홍 철쭉이 모습드러내 ⓒ김강임
하지만 안개 걷힌 한라산 영실 하산 길에는 꽃 분홍 철쭉꽃이 다시 깨어납니다. 그리고 오백장군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마치 효도를 다 하지 못한 내 마음 같이.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http://www.ohmynews.com) 제휴기사 입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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