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 유적지, 당산봉, 차귀도, 수월봉이 발길 붙잡는 마을

고산리 해안 용수리 마을에서 바라본 고산리 해안절경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이 차귀도이고, 가운데 있는 것이 눈섬이다. 가장 왼쪽에 돌출한 봉우리가 당산봉이다. ⓒ 장태욱 고산리

제주도는 섬 가운데에 한라산이 솟아 있다. 남북으로는 길이가 짧게, 동서로는 길게 뻗어 있다. 따라서 섬은 마치 고구마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는데, 그 고구마 모양의 동쪽 끝단에 는 성산 일출봉이, 서쪽 끝단에는 고산 수월봉이 있다.

제주시내 중심부에서 한경면 고산리까지 거리는 어느 도로를 타고 가나 대략 50km 안팎인데, 이는 직접 운전하면 넉넉잡고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다. 시내에서 고산리까지 초행길인 여행객들이라면 일주도로(1132번 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산리가 해안에 있기 때문에 일주도로를 타고 가면 길을 혼동할 우려가 없기도 하거니와, 푸른 바다를 우측에 끼고 운전하면서 제주 자연이 가져다주는 평화에 취해보는 것도 여행에서 덤으로 얻는 기쁨이기 때문이다.

차귀, 무속의 고향

제주시 한경면은 판포리에서 시작된다. 판포리를 지나면 면사무소가 소재한 신창리에 이르고, 신창리를 지나면 운전자의 정면에서 큰 봉우리가 시야에 나타난다. 이 봉우리가 당산봉인데, 당산봉 동쪽은 용수리이고, 그 서쪽이 고산리이다. 

당산봉 멀리 수월봉 정상에서 바라본 당산봉의 모습이다. 당산봉 인근 해안 가까운 곳에 있는 섬이 눈섬이다. ⓒ 장태욱 당산봉

높이 148m인 이 오름을 과거에는 차귀악이라 하였다. 당산봉이란 이곳에 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당은 대정현 성황사(城隍祠)인 차귀당으로, 뱀 귀신을 모셔 제사하던 곳이다. 이곳에 좌정한 당신을 '법서용궁또'라 한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제주안핵어사겸순무어사에 임명되어 제주에 왔던 이증(李增)은 5개월간의 제주체류기간 동안 자신이 제주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일기체로 기록하였다. 이를 번역한 것이 남사일록(南槎日錄)이다. 이증이 1680년 2월 24일에 이곳을 방문한 후 남긴 기록이다.

"차귀당은 차귀악의 기슭에 있는데, 뱀 귀신을 위한 무속사당이다. 지붕, 벽, 들보, 초석에 무리진 뱀들이 서리서리 얽혀 있으나 제를 지낼 때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서롭게 여긴다. 차귀(遮歸)는 사귀(邪鬼, 사악한 귀신, 뱀신)의 잘못된 표기이다."

차귀(遮歸)가 사귀(邪鬼)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에 대해 주민들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민간에 전해오는 전설에는 차귀라는 이름이 호종단이 서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는 데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호종단은 중국 황제가 제주도에서 천하를 호령할 영웅이 출연할 것을 염려하여 그 맥을 끊으라고 보낸 지관이다. 그가 제주의 지맥을 끊고 돌아가는 도중 차귀도가 있는 지점까지 왔을 때, 날쌘 매 한 마리가 날아와 돌풍으로 변해서 호종단이 탄 배를 침몰시켰다고 한다.  이 매는 한라산 신령이 변한 것이라고 하는데, 호종단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은 데서 '차귀(遮歸)'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한라산 신령이 매로 변해 호종단의 귀향을 막았다는 전설은 비양도에도 전해진다.

 

고산 평야 제주도에서 드믈게 고산에는 벼가 재배된다.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수월봉이다. 이 평야 가운데서 고산리 유적이 발견되었다. ⓒ 장태욱 고산리

1987년 고산리에서는 주민에 의해  선사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이 고산리 유적지는 당산봉의 서쪽에 넓게 펴진 해안단구 대지에 있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제주에 살았던 선사인들의 흔적이다.

이 섬을 찾은 사람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1만 년 전에는 지금의 황해가 바다가 아닌 육지에 속했고, 그 위를 강이 흐르고 있었다. 고산리 유적의 주인공들은 아무르강가에서 사냥을 위해 이동하던 구석기인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걸어서 지금의 황해 자리를 지나 제주를 방문했다가, 지구 온난화에 의해 황해에 바다가 형성되자, 제주섬에 고립된 사람들이다.

제주섬에 고립된 이들은 처음에는 한라산을 터전삼아 사냥으로 통해 삶을 지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맘모스와 같은 느린 사냥감들은 점차 자취를 감췄고, 토끼와 노루 같은 발 빠른 동물들만 남게 되었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그들은 사냥기술을 더 발전시켜야 했고, 초보적인 수준일지라도 농경을 익혀야 했다.

고산리식 토기 국내 유일의 초기 신석기 유물이다. (제주국립박물관에서 촬영) ⓒ 장태욱 고산리 유적

고산리유적지에서는 구석기 유물인 세형돌날문화 석기들과 더불어 초기 신석기의 여명을 알리는 화살촉, 고토기가 함께 출토되는 것은 이들이 시대적 전환기에 이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 고산리 유적은 국내에 유일한 초기 구석기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고려말과 조선조에는 이 일대에 왜구들이 자주 침범하였다. 조선 효종 3년(1652)에 제주목사 이원진이 이곳에 성을 쌓고 병영을 만들었는데, 그 병영을 차귀진이라 했다. 차귀진에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이 일대를 방어하자 왜구들의 침입이 줄어들고 평화가 찾아왔다. 이를 보여주는 이원진의 시다.

비 갠 영주(과거에 제주 섬을 부르던 이름) 기상 새로워
윤건 쓰고 홀로 성 위 언덕에 오르니
북은 대륙과 이어지는 삼면의 바다
서는 중국과 떨어져 한 점 먼지
농부는 담을 쌓아 말 뜯어 먹을까 막고
들판의 노인 술을 가져와 뱀신에게 드리네
이제 죽도(차귀도의 옛 지명)엔 풍파 없으매
장군은 할 일 없어 비단 자리에 취하네

마을 형성 이후 서부 중심지가 되기까지

조선후기에 들자 이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1837년 한개(현 금등리)에서 고태옥이라는 주민이 현 고산리 2088번지로 이주하여 살기 시작한 이후, 이주민이 증가하여 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마을 이름은 차귀라는 지명대신 신두모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고산리 마을 고산리는 제주도 극서부의 중심지다. ⓒ 장태욱 고산리

신두모는 다시 당산리로 개칭되고, 1892년에는 당산리가 고산리로 개칭되었다. 일제시대에 접어들어 1917년에는 고산리는 고산 1, 2, 3구로, 다시 1940년에는 고산1, 2, 3, 4구로 분리되었다. 그 후 해방을 맞고 1951년에는 이들이 모두 고산리로 통합되었다. 1953년에는 마을이 고산1, 2, 3리로 분리되고, 1959년 다시 고산1, 2리를 1리로, 고산3리를 고산2리로 하여, 고산1, 2리 체계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고산리는 제주도의 서쪽 끝단에 위치하여 제주 극서부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한경면의 면소재지는 신창에 존재하지만, 그 외 많은 기능을 고산리가 감당하고 있다. 고산리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고산초등학교 학교 뒷편에 보이는 봉우리가 당산봉이다. 고산리에는 초등학교 이외에도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있어서, 제주 서부의 교육 중심지 역할을 감당한다. ⓒ 장태욱 고산리

당산봉 서쪽, 수월봉의 북쪽에는 너른 대지가 자리 잡고 있다. 제주도의 모양이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서 경사가 완만한 제주 섬의 서쪽 끝단이 만들어낸 지형이다. 순무어사로 왔던 이증이 기록하기를 "제주섬 전체 가운데 논밭은 아주 적고 홍로촌(현 서귀포시 동홍동)을 기점으로 차귀, 명월 사이에 자못 많으나 또한 놀고 있는 빈터가 많아 아까웠다"고 했다. 과거에도 이 일대에는 너른 평야가 있었다는 기록이다.

7시도 안된 이른 아침에 농부들이 마늘씨를 파종하고 있었다. 이 일대에서 생산되는 황토 마늘은 알이 굵고 향이 짙어서 그 우수한 품질을 인정받고 있다. 한경면에서는 황토마늘을 전략품목으로 지정해서 농가소득 증진을 위해 열을 올리고 있다.

파종 새벽에 농부들이 밭에 마늘을 파종하고 있었다. ⓒ 장태욱 고산리
 

한 폭의 풍경화와 같은 마을

수확을 앞둔 조와 벼가 농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끊임없이 물을 필요로 하는 벼 밭에는 스프링클러로 물을 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분주한 가을 들녘이 이 일대 빼어난 절경과 어우러지면서 잘 그려진 한 폭의 풍경화로 다가왔다.

고산의 너른 평야를 왼쪽에 끼고 고산포구로 향했다. 포구에 도달할 무렵 검은 현무암 바위 위에 푸른 풀이 뒤덮여 있는 차귀도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는데, 그 형상이 마치 큰 새가  비상하기 위해 날개를 펼친 듯 했다. 매가 호종단의 귀향을 막았다는 전설도 이 섬 형상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산리 해안 당산봉 중턱에서 바라본 고산리 해안의 모습이다. 앞에 보이는 포구를 주민들은 '돔베성창'이라 부른다. 포구에서 가까이 보이는 섬이 눈섬이고, 그 뒤에 보이는 섬이 차귀도다. ⓒ 장태욱 차귀도

고산 포구가 자리 잡은 동네를 주민들은 '자구내'라 부른다. 고산평야를 가로지르는 자구내가 바다와 만나는 곳에 형성된 마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구내에 있는 포구를 '돔베성창'이라 부른다. 돔베란 제주어로 '도마'를 뜻하고, 성창이란 포구를 말한다. 주민들 눈에 비친 포구의 모습이 부엌에서 쓰는 도마와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돔베성창 입구에 들어서니 해산물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바다로 나가는 길목에서 할머니 한분이 한치 오징어 머리들을 접어 줄에 감은 후 나무로 만든 이쑤시개를 핀으로 삼아 구멍을 뚫고 줄에 고정시키고 계셨다.

이 마을 고인춘(80세) 할머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배에서 낚은 한치 오징어를 직접 사다가 손질해서 햇볕에 이틀 간 말린 후 손님들에게 판다고 하셨다. 포구 인근에 할머니가 손수 운영하는 가게도 있었다.

고 할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자구내 마을 주민들은 거의가 농사를 짓지 않는다고 한다. 주민들 대부분이 바다에 의존해서 삶을 지탱한다는 거다. 고산리에서 농사를 짓는 주민들은 대부분 윗마을에 산다고 하셨다.

 

고인춘 할머니(80세) 구입한 오징어를 손수 손질해서 햇볕에 말리는 모습이다. ⓒ 장태욱 고산리

대화 가운데서 전혀 듣고 답하는데 불편함이 없으셨다. "연세에 비해 건강하시다"고 했더니, "아직까지 귀도 멀쩡하고 몸도 멀쩡하다"며,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반문도 하셨다. 그리고 "고산리 오징어 맛이 좋으니 홍보 많이 해달라"는 당부도 빼놓지 않으셨다.

고 할머니를 통해서 척박한 환경을 극복하며 삶을 지탱해온 제주 여성의 진면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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