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부 '좌익' 낙인에 4·3 사건 당사자들 통곡한다

▲ 표석 성읍 민속마을에서 가시리 마을로 들어오는 길목에 마을 표석이 있다. ⓒ 장태욱
성읍민속마을은 제주 정의현의 옛 모습을 비교적 잘 본존하고 있어서, 제주에 처음 방문한 관광객들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찾게 되는 곳이다. 이 성읍민속마을에서 서쪽으로 가면, 이 마을과 인접한 가시리에 이르게 된다.

4·3 당시 가시리에는 400여 가구에 1700여명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주민 500명 정도가 희생을 당하여 남제주군에서 가장 피해가 컸던 마을이다.

4·3 당시 남제주군에서 피해가 가장 컸던 가시리

비극은 1948년 11월 15일에 서북청년단과 충남부대 대원들이 마을을 불태우면서 시작되었다.

갑자기 들어닥친 토벌대에 놀란 주민들은 인근 야산으로 몸을 숨겼고, 사람들은 현장에서 총살당하기도 했다. 주민들 중 상당수는 표선리나 토산리 등 인근 해안가 마을로 피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군경은 피신한 주민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표선으로 내려간 사람은 표선국민학교에, 토산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토산 절간 고구마창고에 집단 수용했다.

1948년 12월 22일,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던 가시리민 중 가족이 함께 모여있지 않은 주민들을 '도피자 가족'으로 분리했고, 이들 중 15세 이상이 되는 사람은 모두 표선리 버들못에 끌고가 총살했다.

군경이 마을을 불태울 때, 많은 이들이 놀라서 야산에 몸을 숨겼기 때문에 많은 대다수 주민들이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되어야 했다. 가족이 함께 있지 않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무장대 동조 세력'으로 몰렸던 것이다.

토산마을에서도 희생은 이어졌다. 가시리 주민들은 절간 고구마창고에 집단 수용되었으며, 거의 매일 사람이 죽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고구마창고에 수용되었던 주민들은 표선리 한모살 백사장에서 학살됐다.

▲ 새가름 4.3당시 군경에 의해 마을이 파괴되어 사라진 후, 복원되지 못했다. ⓒ 장태욱
49년이 되자 해안 마을로 도피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와 성을 쌓고 집단생활을 했다. 그 뒤 마을은 복원되었지만, 가시리 동쪽에 속해있던 '새가름'이란 동네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이 곳에는 제주도지사 명의로 '잃어버린 마을'표석이 세워져 있다. 표석에 세겨진 내용의 일부다.

'4·.3의 광풍은 이 마을에도 여지없이 불어닥쳐 마을은 전소되어 잿더미가 되었고, 주민들은 인근 마을 등 주변에 흩어져 힘들게 연명하였다. 그 중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되었던 이 주밎들 가운데 17명이 속칭 버들못 근처에서 목숨을 잃는 등 4·3사건을 거치면서 25명이 희생되었다.

1942년 2월부터 가시리가 현재의 리사무소를 중심으로 재건되면서 2호가 새가름으로 다시 돌아왔으나 외로움에 못 이겨 또다시 떠나가 버려 끝내 예전의 마을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억울하게 희생된 고혼들을 신원하고 다시는 이 땅에 4·3사건과 같은 역사적 비극이 재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상생의 염원을 모아 이 표석을 세운다.'

주민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세월"

지난 달 서울에서 제주4·3에 관심이 있는 한 인사가 "제주4·3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싶다"며, 지인을 통해 나에게 "현지답사를 함께 해달라"고 부탁했다. 난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여, 그들 일행과 함께 가시리에서 주민들의 체험을 육성으로 듣게 되었다.

오임종 표선면 4·3유족회장과 안봉수 가시리장의 당시 자리를 주선했고, 이날 증언에 참여한 주민은 오국만 전 가시리장, 오태경 전 가시리 노인회장, 김기완 전 노인회장, 정덕재 전 가시리장 등이었다.

오국만씨와 김기완씨는 표선국민학교에 수감되었고, 오태경씨와 정덕재씨는 토산리 절간 창고에 수감되었다고 한다.

▲ 오국만 전 이장 당시 가족을 잃고 어린 두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되었다. ⓒ 장태욱
오국만씨는 당시 17세는데, 5남매 중 이미 결혼한 두 형님들은 제주의 전통 풍습대로 부모를 떠나 따로 살림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마을이 토벌대에 의해 갑자기 불타 폐허가 되자 가족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로 인해 그의 가족도 도피자 가족으로 분류되었다.

"48년 12월 12일이었습니다. 저는 부모님하고 두 어린 동생과 함께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되었습니다. 저는 당시 나이가 17세였는데, 키가 작아서 아버지는 수용자 명부를 작성할 때, 제 나이를 14세로 올려놓았습니다. 군인들이 가시리 주민들을 운동장에 소집시키고 나서, 14세 이하 어린아이들은 분리를 시켰습니다. 나머지 주민들은 모두 끌고 가 총살을 시켰습니다.

저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부모님을 여의고 두 동생과 함께 고아가 되었습니다. 조와 보리 농사는 물론이고, 장작 패는 일, 숯 굽는 일 등 안 해 본 일 없이 다 했습니다. 배부르게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김기완씨도 당시 표선초등학교 현장에 함께 있었다. 김기완씨는 당시 14세였는데,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가족을 모두 잃고 말았다.

"저는 부모님·할아버지와 함께 운동장에 있었어요. 어린아이들은 따로 모이라고 하는데, 할아버지가 자꾸 제 손을 잡는 겁니다. 가족이니까 함께 있자는 거였지요. 그런데 전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할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 바람에 가족에서 분리되어 목숨을 건졌지만 나머지 가족은 모두 목숨을 잃었습니다."

김기완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씀을 이었다.

"당시 할아버지가 왜 함께 가자고 했으며, 제가 무슨 생각으로 거절했는지 어린 시절 일이라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함께 죽는 것이 나을 뻔 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로 자라면서 겪은 고초가 말이 아니었습니다."

오국만씨와 김기완씨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어린아이들이라고 모두 살려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오국만씨 증언이다.

"가시리 강덕진씨 가족이 표선국민학교에 우리와 함께 수감되었어요. 토벌대가 마을을 불태우자 그 집 장남이 무서워서 산으로 숨었지요. 그래서 도피자 가족이 된 겁니다. 민보단 대원들이 부부를 밖으로 데리고 가려는데, 어린 딸이 놀라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부부는 물론이고 어린 딸을 주민들이 보는 가운데 총살했습니다. 토벌대는 사람 죽이는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렀습니다."

   
오태경씨는 당시 18세였으며, 토산 절간 창고에 수용되었다. 키가 작아 나이를 속여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하루는 토산 절간 창고에 도피자 가족으로 보이는 여자가 아기를 업은 채 군인에 의해 잡혀왔습니다. 군인들은 우리가 보는 앞에서 그 여자를 총으로 쏘았습니다. 그 여자는 죽으면서도 몸으로 아기를 감싸, 살려보려고 애썼어요. 그런데 총소리에 놀란 아기는 죽은 엄마의 품을 빠져나와서 울면서 엄마의 시신 위로 기어오르는 겁니다. 우리는 숨을 죽인 채 그 장면을 목격하고 있었고. 그런데 그 군인이 아기마저 총으로 쏘아죽인 뒤, 우리에게 박수를 치라는 겁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입니다.

어느 날 토산 주민들이 포승줄에 묶여서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그날 끌려간 주민 200여명이 모두 총살을 당했습니다."

국방부, 억울한 주민들의 증언 들어야

4·3을 직접 체험한 주민들은 하나같이 "미친 세월이었다"고 했다. "영문도 알려주지 않고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정부가 사람을 죽였다고 하면 세상 누가 믿겠냐"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다시 제주4·3을 '좌익세력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국방부는 최근 고교 근현대사 교과서 중 제주 4·3 사건에 대한 부분을 "대규모 좌익세력의 반란 진압 과정 속에 주동세력의 선동에 속은 양민들도 다수 희생된 사건"으로 수정하도록 요구했다고 한다. 국방부 당국자들이 제주4·3을 겪은 이들의 생생한 증언을 들어볼 것을 권한다.

군인들이 '국민의 심장에 총을 쏘던 광란의 시대'를 다시 꿈꾸지 않는다면, 적어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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