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 기고] 섭지코지에서 발길을 돌리며...

이 글은 조병준님이 최근 성산읍 섭지코지를 둘러보고 그에 대한 느낌을 ‘제주의 소리’ 자유게시판에 올렸습니다. 섭지코지는 드라마 ‘올인’으로 새로운 관광지로 각광 받고 있습니다. 남제주군은 섭지코지에 ‘올인’ 세트를 설치해 관광지로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11월말 현재 123만명이 다녀가고 지난4월 주차료 수입만도 1억2000만원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병준님은 이렇게 새롭게 단장한 섭지코지에 ‘유감’의 글을 적어주셨습니다. 섭지코지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전문을 실습니다. 편집자주

▲ 성산포 섭지코지에 새롭게 들어선 드라마 올인 기념관
거의 2년만에 '그리운 제주'를 찾아갔습니다.
2년 전 여름, 처음 제주를 찾았고,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저 역시 제주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철따라 한 번씩은 제주를 찾으리라,
서울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결심했었지요.
철따라 찾겠다는 결심은 물론 무리한 결심이었습니다.
아쉽지만 이렇게 다시 겨울 제주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합니다.

중산간에서의 눈보라, 협재 앞바다의 구름과 파도,
용눈이 오름, 아부 오름의 쓸쓸함,
1주일만에 마지막 떠나는 날 겨우 모습을 보여 준 한라산....
그리고 2년여만이었지만 여전히 어제 헤어진 사람들마냥
따뜻하게 이방인을 맞아주셨던 제주의 사람들...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인생에는 언제나 옥의 티가 끼어들게 마련이라고 했던가요?
여행이 인생의 축소판이라니,
여행에도 옥의 티는 끼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까요?

섭지코지.
2년 전 여름, 제주의 후배가 저를 그곳에 데려갔습니다.
한창 시즌이었고, 따라서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 기억 속의 섭지코지는
때 묻지 않은, 거칠고 동시에 고즈넉한 자연의 모습으로 남았습니다.
위대한 자연의 힘이라고 믿습니다.
자연 그대로 남겨진 자연 속에서
사람은 언제나 자연과 1:1로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주변에 있어도
그 풍경 속의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기억에 남깁니다.

김영갑님의 두모악 갤러리를 방문하고
전복죽을 먹으러 성산으로 가는 길에 후배에게 부탁했습니다.
섭지코지를 다시 보고 싶다고요.
후배가 말했습니다.
"저라면 다시 안 갈 거에요.
그때의 그 분위기, 지금은 없어요.
드라마 때문에 난리가 났거든요...."
드라마 한 편이 풍경을 망치면 얼마나 망치랴 싶어
그래도 후배를 졸랐습니다.

▲ 섭지코지를 새로운 관광지로 부상시킨 드라마 올인의 당시 세트.
칼바람을 맞으며 섭지코지에 도착했습니다.
칼바람에도 당당히 맞서며
드라마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의 사진들이
사람들을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한눈에 보기에도 조악하기 이를 데 없는
무국적, 무취향, 무의미한 건물 하나가
풍경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더 올라가 보실래요?"
후배가 물었을 때 저는 돌아가자고 답했습니다.

2년 전 여름 섭지코지의 풍경은
이제 제 기억 속에서 삭제되었습니다.
삭제된 그 자리에 겨울 칼바람에 펄럭이는 배우들의 사진과
황당한 드라마 세트가 들어섰습니다.
섭지코지의 그 아름다운 쓸쓸함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드라마의 인기를 이용해 관광객을 늘린다구요?
한류 열풍을 최대한 활용한다구요?
'텔레비전 공화국' 대한민국의 폭력이
섭지코지만 망가뜨린 게 아니란 것, 잘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에 등장하기만 하면
그 풍경은 곧바로 벌떼처럼 달려드는 드라마의 유령들로
뒤덮입니다.
정동진이 그렇고, 남이섬이 그렇고, 영덕이 그렇고
충주호가 그렇고, 또또또.....

묻고 싶습니다.
45억 년에 걸쳐 자연이 만들어놓은 위대한 풍경보다
며칠만에 뚝딱거려 만들어놓은 조악한 드라마 세트가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인다고 생각하십니까?
소위 '스타'들의 사진 한 장이
몇 년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많진 않지만 그래도 몇몇 바다 건너 나라들을 다녀 본 덕에
조금은 압니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남겨 놓을 때
사람들은 자꾸 그 자연을 찾아간다는 것을 말입니다.
드라마를 기억하며 그곳을 찾은 사람들에게도
정말 만나고 싶은 대상은
드라마의 유령들이 아니라 그 드라마의 배경이자 주인공이었던
풍경일 것입니다.

성산으로 달리는 차 안에서
후배에게 농담을 했습니다.
"밤에 몰래 가서 그 사진들하고 세트 좀 다 치워버려라.
변호사 비용은 내가 댈게..."
씁쓸한 농담이었습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드라마 세트장이 되는 듯합니다.
악몽입니다.
이 악몽에서 빨리 깨어나고 싶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릅니다.
다시 제주에 가는 날, 섭지코지에서
그 폭력적인 드라마의 유령들을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드라마 따위에 빌붙어 얄팍한 주머니를 채우려 하기에
제주는 너무나 위대한 아름다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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