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날, 판포에서 영락까지

흐리지만 포근함이 느껴지는 날씨다. 얄팍한 추리닝을 걸치고 집을 나서려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우산까지 챙겼다. 비록 회색빛 하늘이라고는 하나 풋풋한 생기마저 감도는 제주,  라디오에선 강석우·양희은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이 막 끝나고 있었다. 하귀에 도착하니 여전히 차가운 날씨, 얄팍한 옷차림이 아무래도 잘못했지 싶다. 버스가 곽지에 도착할 즘, 지난주와 똑같이 차창엔 빗방울이 떨어진다. 한림에 다다르자 쏟아질 것 같은 비, 밭 돌담에 앉아 있는 까치 한 마리의 지저귐이 들리는 듯하다.

비다. 어떡하나? 윈도우브러시가 부지런히 움직인다. 판포 상동에서 내렸다. 해안가의 비바람을 우산으로 막으며 화단의 송엽국 앞에서 잠시 멈췄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는 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혹이듯 나를 바라보는 그 눈길 차마 무시하지 못했다. 계절을 가리지 않고 피거니와 채송화를 닮았다 하여 사철채송화라고도 부른다.

   

겨울은 정중앙에 정좌하고 있는데도 봄이 어디쯤 왔는지 궁금한 것일까? 간간이 광대나물이 제법 피어 빠끔히 목을 내밀고 있다. 다행히도 비는 멈췄다.

   

길가의 요정인 양 추위에 시달리면서도 꽃을 피운 유채꽃이 기특하기도 하여라.  비록 여러 송이 모여 있지는 않아도 귀엽다.

   

한경 지서에 막 도달하기 전,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아직도 가을이 남아있나 싶었다.

   

겨울의 구박에 못 이겨 시달렸음직도 하련만, 어디 하나 나무랄 데 없이 곱게 핀 코스모스. 이들은 어쩌다 한 송이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무리 지어 핀 곳도 있었다.

   

그러고 보면 사계가 공존하는 것 같다. 아직 봄은 저 멀리 출발선상에서 발도 내밀지 않았으련만 벌써 냉이는 뜯어 먹어도 좋음직 자라 있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입맛이 돈다.

   

겨울비에 세안을 마친 얼굴이 춥기는커녕 더더욱 싱싱한 개불알풀. 종자의 모습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데, 혐오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름이 곱지 않다하여 지금은 봄까치꽃으로도 불린다.

   

가을이 떠나간 한경 지서의 담벼락엔 계요등 열매가 토속적인 낭만을 즐기고 있다. 낭만이 무르익다 못해 불타는 노을을 연상시킨다.

   

한경 지서를 지나 신창해안도로로 들어섰다. 저만치 이름 모를 철새 한 마리는 왜 그리도 쓸쓸해 보이던지. 한껏 줌을 당겨 셔터를 눌렀다. 날아나지만 않는다면 가까이 다가가서 말이라도 건네고 싶다.

   

참 고운 해안도로였다. 화창한 봄날이듯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벌노랑이는 어미 닭을 쫓아다니는 병아리를 연상케 하는가 하면, 방긋방긋 웃어대는 아이의 해맑은 표정도 떠올리게 한다. 그 해안가 길목에서 겨울도 아랑곳없다는 듯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암대극도 질세라 장단을 두들기고 있다. 겨울이 떵떵 호령하는 1월의 중간에서도 움츠리지 않는 이들의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발전소의 풍차 돌아가는 소리가 시끄러웠을 뿐,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정말 아름다운 해안도로였다.

   

그 해안도로엔 또 하나의 진풍경이 있었다. 물질을 마친 해녀들이 해녀복을 입은 그대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채취한 해산물을 실은 바구니를 뒤에 매달고 하나의 부대인 양  내달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중계라도 했으면 좋음 직한 진풍경이었다. 어디쯤이었을까? 어부도 해녀도 아닌, 바다를 등지고 앉은 농부상은 까마득히 잊힌 전래동화 한 토막을 떠올리게 하면서 왠지 모를 나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무시무시한 도깨비 발톱을 연상시킨다 하여 도깨비고비라고 했던가, 해안가의 바위에 자리한 모습은 도도하기까지 하다.

   

멀리 차귀도가 바라보이는 곳 용수리 포구는,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에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을 받고 26세란 나이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첫 기착지다.

   

아마도 한경면은 애월읍이나 한림읍보다 따뜻한 곳인가 보다. 한결 포근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다소곳이 피어 있는 냉이꽃은 횡포를 서슴지 않는 겨울도 의식하지 않는 듯했다.

   

차귀도 들어서는 길, 서쪽으로 연결된 길이 있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들어섰다. 한적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가운데 포장마차의 오징어가 행여 행인 한 사람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발가벗은 몸으로 유혹하고 있다. 남편이 유독 오징어를 좋아하는지라 한 꾸러미를 샀다. 주인아주머니는 가면서 먹으라고 한 마리 공짜로 구워 주신다. 가다가 좌측으로 올라서지 말고 우측 해안가를 따라가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용의 아가리를 통해 흘러나오는 물은 세 군데 있었다. 옛날에는 음용수로 사용했던 듯싶지만 이젠 오염이 되었다고 마시지 말라는 안내도 붙어 있었다. 오른쪽엔 갈매기떼 무리지어 날고 우측엔 산이 같이하는 정말 아름다운 차귀도 해안가, 꿈속을 걷는 것만 같다.

   

고산선사유적지를 지나치며 대정읍에 진입하면 버스를 타고 돌아와야지 마음먹었다. 하지만, 일주도로는 나타나지 않았다. 걷다가 소변이라도 마려우면 난처할까 봐 전날 저녁부터 물을 마시지도 않았거니와 평소 물이 잘 당기지 않는 나로서는 물도 챙기지 않았다. 구운 오징어 한 마리를 먹고 나서일까? 몹시도 물이 마시고 싶었다. 아니, 미치도록 귤이 먹고 싶었다. 가게만 나타나면 물보다도 귤을 사 먹어야지 싶었지만, 가게는커녕 인가도 보이지 않았다. 길가에서 마르고 또 마르는 고구마 이삭을 주워 이빨로 껍질을 뜯어내며 씹었다. 아, 이 맛을 무엇에다 견줄까? 단맛이 농축될 대로 농축된 고구마를 씹는 맛은 세상 부러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말라가는 고구마로 내 갈증이 채워지지는 않았다. 못난이 인형 전시장이듯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겨울 볕을 쬐는 무밭. 저 무를 뽑아먹고 싶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를 두려워한 것도 아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무 목이 말랐던 나는 다음에 무밭이 나타나면 기필코 뽑아먹으리라 다짐했다. 몇 개의 무밭을 그냥 지나치고 나중에는 끝내 무밭이 나타나지 않았다. 바위에 기대고 앉아 겨울연가라도 부르는 듯싶은 선인장 열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하나 땄다. 조심스레 껍질을 벗겼지만 작은 가시는 손가락 어딘가에 박히고 말았다. 새콤달콤 앙큼한 맛이 그만이다. 목을 축인답시고 서너 개를 따서는 가시 있는 부분을 바위에 문질렀다. 다 먹고 나니 살 것 같다. 퍼뜩,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스치듯 보았던 석기시대 체험이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신도리 해안가를 지나고, 기껏해야 낚시꾼들의 발소리나 들었을 성싶은 청미래덩굴이 누군가를 기다리다 지쳤을까? 농익은 요염은 지친 내 발목을 붙잡고 셔터를 눌러달라 했다. 저 곱디고운 모습 따다가 족두리 만들고 이제 곧 시집가게 될 조카의 머리에 얹혀줬으면 좋겠다.

   

날은 어둡고, 경찰학교에서 경북지방경찰청으로 발령받고 또 거기서 울릉경비대로 떨어지던 날, '엄마, 나 어떻게 집에 가요?’ 걱정하던 녀석이 떠올랐다. 이러다 일주도로가 안 나타나면 내가 집에 가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발바닥이 너무 아팠다. 신발을 벗으면 괜찮을까 싶었지만 더 불편하다. 난감한 기분으로 걸어가자니 앞에서 걸어오는 한 사람, 손을 치켜들며 인사를 건넨다. 낚시꾼일까 싶었던 그분 역시 나처럼 도보로 제주의 해안가를 여행하는 뭍에서 온 나그네였다. 조금 더 걸으니 영락리로 갈 수 있다는 이정표가 보였다. 해안도로를 포기하고 그 이정표를 따라 걸었다.

   

구멍가게를 찾아서 500밀리 생수를 사서는 단숨에 마셨다. 비록 얄팍한 옷차람이었으나 걷노라 추운 줄 모르다 한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버스에 오르면서 남편더러 마중나와 달라 하고는 킹마트에 가서 젤 먼저 귤을 샀다. 조그만 참고 집에 가서 먹지 아무렴 귤을 사 먹느냐고 어처구니없어한다. 그래도 좋았다, 사서라도 귤을 먹어야만 살 것 같았던 것이다. 11시 57분에 판포에서 내리고 다섯 시 56분에 영락리에 도착한 하루도 정확히 여섯 시간을 걸었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발도 제대로 딛지 못하며 집에 도착하고 보니 오른쪽 검지 발가락 아래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있었다. 그래도 아름다운 해안의 풍경에 빠져 걸었던 시간을 생각하니 마냥 행복하기만 했다. ‘구경 한번 잘했네.’라는 어느 유행가 가사를 떠올리며 나도 모르게 팔도유람이라도 한 듯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제주의소리>

<고봉선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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