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마을 이야기 4] 마을을 지키는 넉넉한 오름, 자배봉

▲ 자배봉 멀리 동서로 길게 뻗은 오름이 자배봉이다. 망앞은 자배봉 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 장태욱

위미마을 북동쪽 경계에는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켜주는 넉넉한 오름이 서 있다. 해발 203미터 높이의 기생화산인 자배봉이다.

자배봉 정상에 서면 기생화산임을 알 수 있게 하는 분화구가 눈에 들어오는데, 그 깊이가 약 80미터에 이른다.   
  

▲ 자배봉 정상에서 바라본 이 일대 농원 자배봉 정상에 서면 이 일대가 훤히 내다 보인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곳에는 봉수가 있었다. 고대인들이 이 오름 정상에 고인돌을 세운 것도 이 곳에서 주변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장태욱

자배봉은 원래 이름이 자배오름 혹은 조배오름이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구실잣밤나무를 자배낭 혹은 조배낭이라고 부르는 것을 감안하면, 이 오름에 자생하는 구실잣밤나무에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배머들코지의 명칭이 조배낭(구실잣밤나무)에서 유래한 것과 같은 이치다. 실제로 자배봉의 분화구 안에는 구실잣밤나무들이 왕성하게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주민들은 자배봉을 망오름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봉수가 있던 오름을 부르는 일반명사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이 오름 정상에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사실을 알려주는 하는 이름이다. 
  

▲ 산책로 자배봉 정상으로 오르는 길이다. ⓒ 장태욱

기록에 따르면 자배봉의 봉수는 세종 21년(1439년)에 설치되었는데, 이곳에는 6명의 별장과 12명의 봉군이 근무했다. 유사시에는 동쪽으로는 토산봉과, 서쪽으로는 예촌망과 불을 피워 신호를 교환했다. 지금도 오름의 정상에는 조선시대 봉수대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다.

최근에는 마을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자배봉에 산책로를 잘 정비해 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정상으로 가는 길은 밤나무, 도토리나무, 편백나무 등이 모여 숲을 이루고 있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비치는 조용한 숲 속 길을 걷다보면 사방에서 새들이 지저를 댄다.

20분쯤 걸어 올라가면, 길이 정상에 이를 즈음에 독특한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안내표지가 없다면 그 평평한 상판에 몸을 맡겨 잠시 쉬어가기에 적당한 바위다. 그런데 표지판에는 고인돌이라고 적혀있다.
  

▲ 고인돌 자배봉 정상에서 고인돌 한 기가 발견되었다. ⓒ 장태욱

제주도내 고인돌 대부분은 해발 100미터 이하에 자리 잡고 있다. 또, 이들은 대부분 용담동, 외도동, 광령리 등 제주 북부 및 서북부와 서귀포시 대정읍 동일리, 가파도, 상예동 등 서남부에 집중되어 있다. 제주 동남부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고인돌을 만드는 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일은 덮개돌을 떼어내고 운반하는 과정이라고 한다. 평지에서도 바닥에 통나무들을 깔고 그 위에 고인돌 상판을 얹어서 이동하는 데는 장정이 적게는 50명, 많게는 200명이 동원되어야했다. 그런데 이 무거운 돌을 오름의 정상까지 운반할 정도라면 당시 고대인들이 이 근처에서 상당한 규모로 집단을 이루고 생활했다는 것인데, 실제 이 일대 토질이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살 만큼 비옥하지도 않다.

여러 가지를 염두에 두고 볼 때, 고인돌이 드믄 동남부 지역 해발 200미터 오름 정상에서 고인돌이 발견되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약 2천년 전 이곳에 고인돌을 만든 사람들은 족장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리 강했든지 아니면 바다가 훤히 내다보이는 곳을 고인돌 자리로 찾을 만큼 풍수지리에 일찍 눈을 떴던 모양이다.
  

▲ 표고버섯 재배단지 오름 자락에서 표고버섯이 재배되고 있다. ⓒ 장태욱

자배봉의 정상을 오르는 산책로 못지않게 오름 아래에서 그 주변을 돌아가는 농로도 운치가 있다. 농로 주변에 벚나무를 심어놓았는데, 봄에 꽃이 피면 주변의 돌담과 곱게 어우러진다. 오름 주변을 걷다보면 참나무 토막들이 오름 자락에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누군가 오름에 기대어 표고버섯 농사를 짓는 것이다.

오름 자락에는 무덤 수십 기가 겨울 햇살을 받고 있다. 어느 문중의 묘지인지 모르지만 동쪽에서 떠오르는 햇빛을 맞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다. 이 오름은 모든 것을 바쳐 마을에 살아있는 사람들을 지켜왔다. 그런데 죽은 자들도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안고 있으니 저 따스한 품에 뭍인 자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자배봉의 바로 남쪽에는 '망앞'이라는 자연마을이 있다. 망오름(자배봉)의 앞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곳에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 위미 마을에 일주도로가 개설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일제가 도로를 개설하면서 주민들로부터 집과 땅을 강제로 빼앗는 바람에, 터전을 잃은 주민들이 집단으로 이곳에 이주하여 정착했던 것이다. 
  

▲ 무덤 자배봉 자락에는 묘지가 있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을 받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위치다. ⓒ 장태욱

한편, 망앞은 위미마을의 최초 정착자로 알려진 고좌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그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에 전해지는 고좌수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고좌수는 재력과 위세가 대단하여 정의현에서도 그를 모르는 자가 없었다. 그가 얼마나 욕심이 세고 심술이 사나웠는지, 지나는 사람을 불러서 억지로 자기 집에 일을 시켜도 거부할 만 한 자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고좌수에게 죽음은 너무나도 허무하게 다가왔다. 어느날 정의현청을 다녀오다가 술에 취한 나머지 한남리 지경에서 얼어죽고 만 것이다. 

그런데 지나가던 청년이 고좌수의 주검을 발견했다. 그 청년은 고좌수가 평소 자신들에게 부렸던 행패를 떠올리더니 분을 이기지 못하고 고좌수의 성기를 자르고 만 것이다.

한편 고좌수의 가족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육지에서 지관을 청해 명당터를 찾기 시작했는데, 당시 지관이 찾은 묘터는 '망앞'에 있었다. 당시 지관은 고좌수의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전하고 떠나버렸다.

"이곳은 황우지지(黃牛之地)라는 명당터인데, 관을 묻을 때에는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관은 시신이 위아래로 바뀌도록 엎어서 매장하고, 일이 끝난 후에는 앞으로 3년간 무슨 일이 있어도 무덤을 파헤쳐서는 안 됩니다."

이에 고좌수의 부인은 일가친척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주변에 장막을 쳐서 타인의 시선을 막은 상태에서 하인과 둘이 하관의식을 치렀다. 부인은 하인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신신당부하고 지관이 시킨대로 관을 뒤집어 매장을 했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1년이 지나자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고좌수의 두 아들이 갑자기 힘이 강해져서 당할 사람이 없어졌다. 그러더니 영문도 없이 사람들과 싸움을 벌였고, 집안에서는 하인들에게 난폭하게 굴기 시작했다.

고좌수 부인은 아들들에게 '참고 자중해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아들들의 횡포는 갈수록 더해졌다. 그리다가 큰 아들은 좁은 제주에서는 더 이상 살수 없다고 하여 서울로 떠나버렸고, 형이 떠나버려 제 세상을 만난 둘째 아들은 더욱 포악해져 하인들에게 폭력만 일삼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고좌수의 하관에 함께했던 하인이 둘째아들의 횡포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장례의 비밀을 깨고 말았다. 부친의 관을 뒤엎어 묻었다는 말을 들은 둘째아들은 아버지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둘째아들이 부친의 무덤을 파헤치자 큰 황새 한 마리가 뒷발을 세우고 있다가 푸드득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다. 주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놀란 나머지 흙을 다시 덮으려 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없어서 서울로 갔던 큰 아들이 역모 죄를 뒤집어쓰고 관아에 잡혀갔다. 그리고 관원들이 집에 들이닥쳐 역적의 집이라고 수색을 하니, 집의 창고에서는 난데없는 화약이 발견되어 둘째아들마저 역모 죄인으로 붙잡혀갈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고좌수의 집안은 완전히 패가망신하고 말았다. 권세라는 것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것인데, 이를 제대로 쓰지 않고 민심을 잃은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지금 권세를 잡고 있다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자들은 잘 세겨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죽은 후에 자신들의 성기를 잘 보존하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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