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마을 이야기 5] 영화롭던 지난 시절의 흔적들

▲  우칫내 하류에 고망물과 서앞개가 있다. ⓒ 장태욱

위미마을 앞개 서쪽에는 마을이 제주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큰 자연 마을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인 서앞개, 조랑개, 고망물 등이 있다.

서앞개 포구는 우칫내가 바다에 만나는 곳에 있다. 포구는 만의 서쪽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서풍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게다가 포구의 바닥이 모래로 되어있어 바위가 배의 바닥에 주는 손상도 피할 수 있다.

▲ 서앞개 포구 안쪽은 바닥이 모래로 되어 있고, 썰물에도 바닥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 어선의 파손 위험이 적은 곳이다. ⓒ 장태욱

 서앞개의 남쪽에는 조랑개라는 포구가 있었다. 작은 말을 조랑말이라 부르듯이, '조랑하다'는 말은 '작다'라는 의미를 지닌 제주방언이다. '조랑개'라는 지명은 포구로 들어오는 목이 서앞개에 비해 작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지만, 썰물 때 서앞개 포구안에 배를 붙일 수 없을 때면 조랑개는 보조포구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이런 좋은 조건을 갖춘 포구가 있었기에,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정기여객선이 기항하기도 했다.

근래에 위미항종합개발계획에 따라 앞개 동서로 방파제가 들어섰고, 항구 안에 새로운 접안시설이 갖춰졌다. 그 바람에 과거 어선을 붙였던 조랑개는 매립되어 사라져버렸다. 근처에 수령 300년이 넘은 노송만이 남아 과거 영화로웠던 시절을 증언하고 있다.

▲ 옛 조랑개 인근 항만이 개발되면서 조랑개 인근은 모두 매립되어 사라졌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접안시설이 마련되었다. ⓒ 장태욱
 
한편, 우칫내가 바다에 이르는 서쪽 지점에는 돌로 만들어진 '위미여인상'이 세워져 있다. 상수도 시설이 갖춰지기 이전에 이 마을 주민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했던 '고망물'과 그 고망물을 기반으로 고단한 삶을 지탱했던 여인들의 근면함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기념상이다. 여인상을 세울 당시 주민들이 새겨 놓은 글이다.

'허벅의 물을 조심스레 항아리에 붓는다. 물허벅으로 고망물을 길어 나르는 일은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여인들의 몫이었다. 이 물로 밥을 지어 식구들 상 차리고 그녀들은 밭으로 바다로 잰 걸음을 옮겼다. 부지런한 여인들로부터 아름다운 위미의 새벽이 열렸다. 이 고망물가에 여인상을 세우는 것도 우리 여인들의 근면하고 강인했던 생활력을 되살려 더 나은 위미의 내일은 가꾸어 가고자 한다. 1999년 12월 위미1리 주민 일동'

▲ 마을주민들이 고망물과 고망물을 기반으로 고단한 삶을 이어왔던 마을 여인들을 자랑하기 위해 세운 <위미여인상>이다. ⓒ 장태욱

예로부터 제주는 물이 귀한 섬이었다. 다공질 현무암이 기반암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지표에 물을 오래 가두지 못한다. 게다가 섬의 모양이 남북으로는 짧고 동서로는 길기 때문에, 남북으로 향하는 하천의 경사각이 다른 곳에 비해 매우 크다. 비가 내리더라도 이 높은 경사각 때문에 물은 쉽게 바다로 흘러가고 만다.

이로 인해 주민들은 늘 물 부족에 시달려야해 했다. 1702년 제주목사에 부임했던 이형상이 이와 관련하여 남긴 기록이다.

'섬에는 물맛이 좋은 샘이 없다. 백성들은 10리 안에서 떠다 마실 물이 있으면 가까운 샘으로 여긴다. 멀리 있는 샘은 4~50리에 이른다. 물맛은 짜서 마실 수 없으나 이 지방 사람들은 익어서 괴로움을 알지 못한다. 외지 사람들은 이를 마시면 곧 번번이 구토하고 헛구역질을 하며 병이 난다.' -이형상의 <남환박물> 중 일부

기록을 보면 당시 제주의 물 사정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물이 귀했기 때문에 마을이 자리 잡기 위해서 용천수는 필수불가결한 조건이었다. 위미마을도 이와 마찬가지인데, 이 마을 주민들이 연중 내내 용수 공급처로 삼았던 샘이 고망물이었다.

▲ 고망물 인근 여인상 왼쪽 계단 아래에 샘물이 솟아나오는 고망물이 있다. ⓒ 장태욱

내 어릴 저 기억으로 식수는 샘물이 나는 고망물 안쪽에서 떠서 물허벅에 담고 집으로 왔다. 여인상이 말해주는 것처럼, 허벅에 물을 담고 운반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었다. 물허벅에 물을 길어 간 여인들은 마당이나 부엌에 있던 물항아리에 물을 채워 식수로 사용했다.

고망물 인근에는 크고 작은 샘들이 있는데 이 샘에서 나는 물이 모여 만들어진 웃수라는 웅덩이가 있다. 웃수는 여름에 아이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다. 과거에는 이 웅덩이에 민물고기가 서식했을 만큼 물이 깨끗했다.

고망물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동안 주부들은 갯가에 앉아서 그 물로 빨래를 했다. 마을 주부들이 해변에 줄을 지어 빨래방망이를 두드리는 것은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7-80년대 개발붐이 일 당시 생활하수를 이 곳으로 배출하면서 깨끗한 웅덩이 물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 고망물에서 샘물이 솟아나는 모습이다. 이 샘물이 과거 위미마을 주민들의 생활용수였다. ⓒ 장태욱

과거에는 고망물에서 솟아나는 물의 양이 지금보다 훨씬 풍부했던 모양이다. 1940년대 이 주변에는 황하소주공장이 있었는데, 이 공장에서는 고망물에서 나는 용천수를 사용하여 소주를 만들었다. 당시 이곳에 소주공장을 세운 이는 훗날 오현학원을 설립한 황순하(黃舜河)씨인데, 10여 년 전 까지도 고망물 북쪽에는 황하소주공장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해방 전후로 앞개 인근에는 여관과 상가가 즐비했다고 한다. 일본을 왕래하는 정기 여객선이 종종 입항하는데다가, 소주공장이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 고망물 간조시에는 수압이 약해 고망물이 지하수를 용출시키지 못해 샘이 말라버린다. ⓒ 장태욱

지금도 고망물에서는 담수가 솟아 나오기는 하지만 간조시에는 샘물이 말라버린다. 고망물 주변의 작은 샘에서는 계속 물이 솟아나는 것과 대조적이다. 그간 제주도 지하수의 수위가 낮아졌기 때문에 고망물을 지나는 지하수 자체의 수압으로는 지표로 샘물을 용출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밀물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해수압의 도움을 받아야 고망물로 지하수가 솟아나온다.

이 모두가 골프장과 호텔 사우나 등을 개발하면서, 과거 제주민들의 생명수였던 지하수를 무분별하게 뽑아 썼던 탓이다. 생수시장에서 돈이 많이 벌린다고 즐거워만 할 일도 아닌 이유다. 고망물이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는 여인상이 슬프게만 느껴졌다.<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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