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한 바퀴 도보여행 나서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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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선의 꽃과 함께] 일곱째 날, 벗어나지 못한 강정

3월의 첫째 주 일요일, 화창한 날씨가 나를 앞장선다. 중문에서 강정으로 들어가려면 공휴가 적용되지 않는 시간표라 하더라도 한 시간은 족히 기다려야 한다는데 5분도 채 안 되어 버스가 왔다. 마치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가용을 가진 것보다 더 정확하게 나를 마중나온 버스가 고마웠다. 월평의 마지막 버스정류소에서 내리고 강정마을 입구에 다다라 해안 쪽으로 들어갔다. 도랑물 흐르는 소리, 새들의 지저귐, 농로와 수로가 어우러져 평화를 노래하는 길, 다시금 공존이란 단어를 떠올려 보았다. 어느 과수원 방풍 나무엔 살림을 차린 송악 가족이 있었다. 얼마나 금실좋게 살았는지 열매에선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귀족티마저 풍겼다. 밭 사이로 난 조그만 길을 따라가자니 길 따라 도랑에선 물이 졸졸졸 흐르고 귤나무 아래엔 개쑥갓이 무더기로 피었다 지고 있다. 멀리서 바라보자니 또 하나의 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진을 올려놓고 막내 녀석에게 무엇인지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개꽃이란다.

▲ 개쑥갓 지고 난 후
▲ 이미 꽃이 지고 난 후의 개쑥갓 무리

오실 님이라도 있는 것일까? 햇볕 잘 드는 곳에 앉아 귀를 쫑긋 세우고 누군가의 발걸음 소리 기다리나 싶은 광대나물이 유난히도 곱다.

▲ 길옆의 광대나물

환기를 위해 열어젖힌 비닐하우스 문 사이로 금빛이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셔터를 누르자니 자꾸만 날 유혹한다. 큼지막한 녀석 하나를 따서 입 안에 넣으니 달콤하게 녹아나는 금귤이다.

▲ 시설재배를 하는 금귤

화훼며 금귤이며 한라봉 시설재배에 노지 농사, 미나리도 날짐승 때문인지는 몰라도 노지엔 그물을 쳐서 키우고 있었으며 겨울수확을 위해 하우스 재배가 이뤄지는 등 농사짓는 모습이 각각 달랐다. 완연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계절을 호령하는 봄, 이곳에 겨울은 더 남아있지 않았다. 지천의 도랑을 차지하고 피어난 유채꽃과 광대나물이 주축을 이루고 계절을 휘젓는 농로 따라 다다른 바다에선 갯내음이 달려와 반갑다고 내 품을 파고든다. 용천수 생태체험장을 따라 손내밀면 잡힐 듯 선명하게 보이는 백록담에선 아직도 모락모락 밀어내지 못한 겨울을 증발시키고 있었다.

▲ 미나리꽝을 바라보는 길가의 광대나물 무리
▲ 냉이꽃

아이들은 바다로 달려나가고 봄은 바다에서 폴짝폴짝 뭍으로 뛰어내리며 훠이훠이 산을 향해 달려간다.

▲ 바다가 좋은 아이들

큰길을 따라 걷다가 바다가 멀어지면서 농로로 접어들었다. 입구엔 비파나무 즐비하다. 어느새 꽃이 지고 몽글몽글 열매가 자란다.

▲ 비파나무

까마귀쪽나무도 빼곡히 열매가 맺혔다.

▲ 까마귀쪽나무

한때는 위엄과 미모를 과시하던 부용이다. 다시 꽃이야 피우겠지만, 종자를 채 떨쳐내지 못한 모습은 어딘가로 날아야만 할 것 같다. 전생의 미련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한 듯 곧 날갯짓이라도 할 것 같은 나비형상이다.

▲ 꽃이 지고 난 후 종자가 남아있는 부용

노숙자 생활이 아직은 두려운가 보다. 고사한 소나무의 벗겨지는 나무껍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간 뽀리뱅이가 갸우뚱 고개를 내밀어 나를 쳐다본다.

▲ 소나무 껍질 사이를 비집고 피어난 뽀리뱅이
▲ 볕을 쬐는 뽀리뱅이

걷다 보면 되겠지. 무작정 걷는 나를 보란 듯이 비웃어버린 막다른 길, 별 수 없이 뒤돌아 나왔다. 몇몇 인가를 지나 다시 바다 쪽으로 뻗은 길, 차 한 대가 가까스로 지날 만한 곳으로 접어들었다. 점나도나물이 간간이 피어 내 발목을 잡는다. 자주괴불주머니도 빠질세라 한껏 치장을 하고 나와 볕을 즐기고 있다.

▲ 자주괴불주머니

마을로 걷다가 다시 농로로 접어들었다. 거베라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보인다. 열린 비닐환기구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엿보았다. 출하를 끝내고 정리에 들어갔나 보다.

▲ 어느 하우스 안, 수확이 끝나고 남은 거베라

대부분이 하우스 농사였다. 바깥에 누워있는 주름잎도 저 하우스 안의 거베라에 질소냐, 드러누운 자세가 요염하기까지 하다.

▲ 누운주름잎

바다를 사이에 두고 다시 길이 막혔다. 뒤돌아갈까도 싶었지만, 저 바다의 바위를 넘어볼까 하는 배짱도 두둑이 생겼다. 바다와 경계선인 돌담을 막 넘으려는 찰나, 낚싯대를 어깨에 멘 아저씨가 저편에 나타났다. 아저씨를 불러세우고 나가는 길이 있느냐고 여쭸더니 뒤쪽을 가리킨다. 딱 한 사람이 바지런히 걸어 길을 만들어놨을 듯싶은 소로를 따라 걷다 보니 난쟁이 유채를 모아놓고 광대나물 무리가 잘난 체 떠들고 있다. 뭍에 오른 여행자 따라 꿀벌은 꽃송이마다 방문하며 인사 나누기에 정신없다.

▲ 키 작은 유채 사이의 광대나물

강정천이 눈앞에 보이는 길가엔 방가지똥 한 포기가 아직은 쓸쓸하다는 듯 봄 길을 노래하고 있었다.

▲ 방가지똥

아, 은어가 산다는 강정천이다. 나는 강정천의 서쪽에 있는데 내 너머 동쪽에 하얗게 무리지어 핀 장딸기꽃이 나를 유혹한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하천으로 들어가 바다를 바라보며 한 컷 눌렀다.

▲ 바다를 바라보는 강정천

하천의 가운데 방석만 한 석창포가 막 꽃대를 밀어올리고 있다. 널따란 하천의 가운데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석창포를 향해 부지런히 셔터를 눌렀다. 저 흐르는 강정천의 물이 나를 골탕먹이고자 하는 꿍꿍이도 모른 채 말이다. 하천의 전방을 살피며 동쪽으로 넘어갈 궁리에 빠졌다. 들쭉날쭉한 바위 사이로 흐르는 물, 그 물을 뛰어넘고 건널 수 있는 장소를 모색하다가 적당하다 싶은 곳으로 징검다리 건너듯 다가섰지만 조금 무리다 싶다. 설마 못 건너기야 하랴, 장딸기의 지독한 유혹은 나를 겁 없게 만들었다.

나름 만반의 준비를 한답시고 다이어리를 가방 속으로 넣고 손에 들었던 카메라도 집 속에 넣어 목에 걸었다. 심호흡 한 번으로 마음을 가다듬고 팔~딱. 아차! 반사적으로 맞은편 바위에 있는 석창포를 붙잡았지만, 이끼에 미끄러지며 퐁당. 두둥실 흐르는 물살 따라 몸뚱어리도 바다로 흘러가려고 했다. 손에 잡힌 석창포가 구조자인 양 있는 힘 싣고 일어서려니 다시 둥실 떠오르는 내 몸이다. 순간에 스쳐가는 생각들이 즐비하다.

'아, 카메라 어쩌면 좋아.'
'아차, 아버지가 서울 병원에 가고자 진료기록을 담은 시디가 가방 속에 있는데 어쩌나.'

곧은 자세로 서면 허리 정도의 높이밖에 안 될 수심이지만, 흐르는 물살은 나를 하찮은 지푸라기로 만들고 말았다. 목 윗부분을 제외하고는 홀라당 젖어버리고 만 것이다.

▲ 강정천 중앙의 바위 위에서 석창포

가까스로 기어나왔지만 흠씬 젖은 옷, 카메라를 꺼내고 가방 속의 시디를 꺼내보니 다행히도 가방 속은 괜찮았다.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내고 우선 밧데리를 분리시켰다. 물이 줄줄 흐르는 저고리를 벗어내고 바위에 걸터앉으니 황당하기도 하였지만,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먼저 나왔다. 엉뚱하게도 시냇가의 봄볕을 맞으며 겨우내 입었던 내의를 벗고 이를 잡는다는 이외수 작가가 떠올랐다. 카메라는 전원조차 켜지지 않는다. 마른 것이라고는 모자밖에 없는지라 모자로 분리된 핸드폰을 닦고 밧데리를 끼워보니 다행이다 전원이 켜진다. 나일론이라면 쉽게라도 마르련만 쥐어짜지 않아도 줄줄 물이 흐르는 옷을 입고 걸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누에게 전화했더니 차가 없단다. 어떡하나 망설이다 서귀포 계신 선배님께 전화했다.

"선배님, 저 좀 구조해 주시면 안 될까요?"

5분쯤이나 지났을까, 차가 왔다고 데리러 온다는 시누의 전화를 받고는 막 출발했다는 선배에게 상황을 말씀드려 멈추도록 하였다. 아무리 좋은 볕이지만 3월 상순이란 시기는 맥을 못 추는 때인가 보다. 오돌오돌 떨려오기 시작했지만, 바지에 잔뜩 달라붙은 거머리 새끼를 떼어내며 시누를 기다렸다. 데리러 온 시누의 차를 타고 과수원에 가서 점심까지 먹고 나니 더더욱 추웠다. 밭을 매던 시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놀라셨는지 달려오셨다. 그래도 말똥말똥 앉아서 밥을 먹는 며느리를 보니 그나마 안심인가보다.

시어머니께선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면 나그네를 모셔놓고 공을 들이신다. 그해의 운세를 보고는 열두 달을 오로지 자식 걱정으로만 지내는 분이시다. 삼재에 든 며느리가 물에 빠졌다니 덜컥 겁이 나 혼쭐 놓고 달려오신 시어머니, 과수원을 나오며 밭 매는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갔더니 호미를 던져놓고 다가와선 냅다 내 어깨를 너덧 번 세차게 두들기신다. 콧등이 시큰해지며 눈물이 핑 돌았다. 행여 당신 며느리가 물에 빠져 넋이라도 나갔으면 어쩌나 싶어 잡귀를 내쫓으려는 당신만의 방법이었던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체한 시간이 너무 길었나 보다. 세 시가 넘었다. 다시 걸을까도 싶었지만, 접사로 풀꽃들과 대화를 해야하는 나로서는 이미 여행의 즐거움을 충분히 잃어버렸다. 시누더러 서귀포로 데려다 달라고 하고선 선배님을 만났다. 찻집에서 차 한 잔을 마시고 밥이나 한 끼 먹자며 길을 나서다 이중섭미술관으로 들어섰다. 그의 거주지였던 뒤뜰에선 목련이 곧 터트릴 듯 팽팽히 부푼 가운데 한 송이는 이미 벌어졌다. 문득 친구가 생각나 전화를 했더니 근무 중이란다. 이내 다시 걸려온 친구의 전화, 선배님과 친구와 모처럼 이루어진 서귀포에서의 저녁시간이 달콤하다. 그 저녁 속엔 강정의 봄 풍경이 들어 있었고 강정천에서 나를 유혹하는 장딸기꽃도 들어 있었다. 이중섭 거주지의 텃밭에 있는 아욱이며 상추며 쪽파며 두릅까지도 고루 들어 있는, 강정천에 빠져서 오히려 더 행복했던 하루였다.

주) 식물의 이름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제주의소리>

<고봉선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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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순 추천순 이 기사에 달린 댓글 4
2009-03-10 07:11:40
저도 하천에서 노닐다가 풍덩 빠진 적이 있습니다.웅덩이 너머에 있을 지도 모를 무엇간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으로 망설임 끝에 폴짝을 시도했다가 결과는 풍덩.
카메라에 아무것도 담을 수 없었던 날이었지만,시간을 뛰어넘는 '추억 한 조각'을 가슴에 적셨던 날이기도 했습니다.
물 속에서 허우적 대시는 모습이 눈에 선하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122.***.***.64

2009-03-10 07:13:23
소리 창간 때 제가 너무 오도방정을 떨었지요?
죄송.
언제 한 번 계곡에나 가요.
꾸벅~!
122.***.***.64

오름산지기 2009-03-10 21:02:22
(놉더댕기당 먼일 내우주)어른들이 이얘기를 상기하며 웃슴에 콧물까지 벌룩대며 쿡쿡거리고있답니다. 글로써주셨지만 내가 갔으면 그관경을 올렸을걸 아깝습니다. 추억에 강정천
211.***.***.28

hyhhhyh 2009-03-10 22:10:25
진짜루 언제 한 번 계곡에 가게요. 오도방정이긴요, 아름답기만 하던 걸요. 그래도 돌이키면 웃음 한 조각 베어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름산지기 님, 진짜 죄인이라는 거 아시죠? 그날 약속만 지켜주셨어도, 같이 동행만 하여 주셨어도 제가 물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겁니다. 어쩌겠습니까, 다 운명인 것을. 고맙습니다.
122.***.***.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