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자암, 섬을 찾은 모든 이들의 안식처

   
▲ 존자암 영실 인근에 존자암이 복원되었다. ⓒ 장태욱

하원은 영실계곡이 소재하는 마을로도 유명하다. 영실은 1100도로 정상 동쪽에 위치하며, 성판악, 어리목, 관음사와 더불어 한라산 정상으로 향하는 주요 진입로 중 한 곳인데,  이곳에 '오백나한' 혹은 '오백장군' 등으로 불리는 기암들이 웅장한 자태로 버티고 있어서, 방문객들이 잠시나마 등반의 고단함을 잊게 한다.

영실 매표소 앞에 서면 존자암으로 향하는 진입로 안내표지가 있다. 이 표지가 가리키는 대로 들어서면 목재와 자갈로 정비된 좁은 산책로가 존자암으로 안내한다. 존자암으로 향하는 길 주변은 온통 조릿대로 뒤덮여 있는 숲이다. 새소리, 시냇물소리를 들으며 길을 걷다보면 속세의 시름을 잠시나마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면서 걷기를 30분쯤 하다보면 복원된 존자암이 자태를 드러낸다.
  

   
▲ 볼래오름 영실계곡에서 윗새오름을 향하는 등반로에서 본 모습이다. 볼래오름 남동쪽 기슭에 존자암이 있다.  ⓒ 장태욱 

존자암이 자리잡은 곳은 해발 1374미터 높이의 볼래오름의 남동쪽 기슭이다. 조선시대까지 이곳에 존자암이 있었다가 폐사되었기 때문에 존자암지라고 부르다가 최근에 이곳에 존자암이 복원되었다.

존자암이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

한편, 불교계 일부에서는 과거 이곳에 있던 존자암이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이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1918년에 이능화가 간행한 <조선불교통사>내용의 일부다.

'탐몰라주 존자도량은 법주기에 이르기를, 16 존자가 각각 정주하게 된 곳이 있다. 그 중 여섯 번째 발타라존자(跋陀羅尊者)가 있는데, 범어 '발타라'는 중국말로 호현(好賢, 어진 것을 좋아한다)이란 뜻이다. 이 존자가 권속 9백 아라한과 더불어 탐몰라주에 많이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 존자암은 곧 발타라 존자의 이름에서 온 것이 아닌가 한다.'

법주기에 따르면, 발타라존자는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직후인 기원전 540년경 탐몰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이능화는 탐몰라가 제주를 지칭하는 단어이므로 발타라존자가 불법을 전파하러 떠난 곳이 제주이며, 존자암은 한국불교 최초의 사찰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김종직의 제자인 홍유손은 김종직과 더불어 무오사화에 연관되어 1498년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는 제주 유배 중에 퇴락해가는 존자암을 보수할 것을 권하는 <존자암개구유인문(尊者庵改構侑因文)>을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존자암은 제주도에 세 성(姓)이 처음 일어날 때 창건되어 세 읍이 정립한 뒤에까지 오랫동안 전해왔으니, 비보소(裨補所)이자 세상에 이름이 난 지 오래다'라고 하였고, '나라에서 이 암자에 논을 하사하여 벼를 심어 재를 지낼 경비를 삼고, 음력 4월에 길일을 잡아 세읍의 수령 중 한 분을 뽑은 다음 목욕재계하여 이 암자에서 제사지내게 하고 이를 국성제라 하였는데, 지금은 이 제사가 폐지된 지 6,7년이 되었다'고 기록했다.

홍유손도 이 존자암이 제주에 고양부(高梁夫) 3성이 나올 때 이미 세워 질 정도로 오래된 절이라고 믿었나보다. 그리고 그의 기록을 통해 1490년 경까지 이 절에서는 국성제를 지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기념비 '국성지위'라고 적혀있다. 과거에 이곳에서 국성제를 지냈던 기록이 있다.  ⓒ 장태욱

복원된 존자암에는 이능화나 홍유손의 기록처럼 존자암이 한국최초의 절이라는 안내문이 있다. 그리고 과거 국성제가 지내졌던 것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도 세워져 있다.

이 절을 다녀간 선비들이 남긴 기록들

존자암과 관련한 내용은 1577년 과거에 합격하고 부친인 제주목사 임진을 뵈러 왔던 천재시인 백호 임제가 남긴 기행문 <남명소승(南溟小乘)>에도 나온다.

백호가 그해 11월 25일(음)에 천제연폭포를 구경하고 대정현으로 향하던 도중 길에서 만난 '범상치 않은' 스님으로부터 '존자암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듣고, 이듬해 봄에 '큰 도끼로 나무를 치고 얼음을 깨며 길을 터서' 영실계곡을 찾아갔다.

그리고 한라산 정상에는 구름이 자욱하여 오르지 못한 날, 그는 존자암에 머물면서 시를 남겼는데, 시에는 '띠집 암자 산 중턱에 매달렸는데'라는 구절이 나온다.

띠는 제주도 들판에서 가장 흔한 풀인데, 제주에서는 초가의 지붕을 덮을 때 이 풀을 재료로 사용한다. 당시 존자암은 제주의 전통 초가와 비슷한 암자였음을 알 수 있다.

1601년 안핵어사로 제주를 찾은 청음 김상헌도 산신제를 올리기 위해 한라산 정상을 오르는 도중 존자암에 들렀다. 그가 남긴 기행문인 <남사록(南槎錄)>에는 당지 존자암의 모습이 잘 드러난다.

존자암의 암사(庵舍)는 아홉 칸인데 지붕과 벽은 모두 기와나 흙 대신에 판자를 썼다. 중들에게 물어보니, '산중에 토맥은 점액이 없고 또한 모래와 돌이 많아 기와를 바르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중간에 여러 번 지었다가 쓰러지곤 하여 계사년간(癸巳年間)에 강진에 사는 중이 애비 대신으로 입방(방호소에 입대)하였다가 봉호의 기간을 마치자 곧 돈을 들여서 중수하였습니다'라고 한다. - 김상헌의 <남사록> 중 일부

당시는 벽돌이나 기와가 흔하지 않던 시절이라, 절을 중수하면서 나무판자를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청음은 한라산 정상을 향해 오르는 과정에서 '수행굴을 지났다'는 기록도 남겼다. 굴에 대해서는 넉넉히 20여 명은 들어갈 만한데, 옛적에 고승 휴량(休粮)이 들어가 살던 곳'이라고 했다. 
  

   
▲ 존자암으로 향하는 길 자갈과 목재를 이용해 길이 정비되어 있고, 주변이 온통 조릿대로 뒤덮여 있다.  ⓒ 장태욱

1679년 순무어사에 명을 받고 제주를 방문한 이증(李增)도 봄에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한라산에 올랐다. 그는 산에 오르는 과정에서 '병문천, 대천(지금의 한천), 무수천을 지나 용생굴(지금의 아흔아홉골)에서 조반을 하였고,…구름과 나무가 사방에 합쳐지고 세죽(조릿대)이 두루 산에 빽빽이 덮여있는 길을 따라 30리를 가서 존자암에 도착하였다'고 했다.

그는 <남사일록(南槎日錄)>에서 존자암에 대해 '이 암자는 옛날에 영실에 있었다. 그 골짜기에는 스님이 도를 닦는 것 같은 돌이 있어서 속설에는 '수행동'이라 했는데, 지금은 (암자를) 서쪽 기슭 밖 10리쯤의 대정 지경으로 옮겨서 다만 유허가 남아 있다'고 기록했다.

1653년에 제주목사 이원진이 남긴 <탐라지>에도 '존자암은 원래 영실에 있었으나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적혀있다. 존자암이 처음에는 영실 등반로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다가 볼래오름 기슭으로 이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존자암지 발굴을 통해 드러나는 옛 모습들

<남사록>이나 <남사일록>에 기록된 수행굴(혹은 수행동)을 제대로 확인한 것은 2001년 12월 한라일보의 조사에 의해서다. 이 굴은 영실 등반로를 따라 정상을 향하여 30분쯤 간 거리에 등반로로부터 100미터쯤 거리에 있는데, 높이가 1.5m, 너비가 2m 정도에 이른다. 원시인들이 거주공간으로 활용했던 바위그늘집과 그 구조가 비슷하다.

한편, 최근에 존자암터를 발굴한 결과, 이곳에서는 고려시대를 넘는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이 절이 탐라 3성과 출발을 같이한다는 옛사람들의 믿음과는 달리, 학자들은 대체로 이 절이 고려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존자암 발굴에서 세상의 관심을 얻은 것은 현무암 부도가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존자암지 부도는 구멍이 많은 돌로 만들어진 석종형(石鐘形) 사리탑인데, 아래로부터 기단석-좌대-탑신석-옥개석-보주를 차례로 얹은 구조로 되어 있다. 원형을 띠고 있는 좌대의 중앙에 있는 볼록한 사리공이 탑신석 아래쪽의 오목한 부분과 맞닿게 만들어졌다고 한다.
  

   
▲ 존자암지세존사리탑 석종형 사리탑인데, 제주도 지방문화제로 지정되었다.  ⓒ 장태욱

존자암지사리탑은  탑의 전체 높이는 190cm이고, 탑신의 폭은 80cm인데, '존자암지세존사리탑'이란 명칭으로 제주도유형문화제 17호에 등록되었고, 지금은 복원된 존자암의 뒤쪽에 세워져 있다.

존자암은 주변에 영실기암을 끼고 있고, 한라산 산신제를 지내던 과거의 관행으로 인해 조선시대 제주를 찾은 선비들이 즐겨 방문하여 머물렀던 명소였다. 그런데 이런 명소가 언제쯤 폐사된 것일까?
 
제주목사를 지낸 이형상이 1704년에 쓴 <남환박물(南宦博物)>에는 존자암의 폐사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다. 그는 존자암에 대해 '옛날에 스님들이 팔정의 도를 닦던 곳인데 … 지금은 거주하는 스님은 없고, 헐린 온돌 몇 칸만 남았다'고 기록했다.

그간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존자암은 17세기 후반 경에 이미 사찰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라산 깊은 숲속에서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섬사람들의 삶을 위로하던 존자암도, 성리학이외의 다른 사상을 배타적으로 대하던 조선 지배사회의 분위기를 극복하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덧붙이는 글 | 존자암이 복원공사가 끝난 것 같은데, 뜰에는 플라스틱과 철재 공사 자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서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산속에 잠겨있는 사찰에 걸맞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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