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하고도 슬픈 북촌리 해안

   
▲ 북촌포구, 과거에는 북포라고 불렀다. 주변 경관과 잘 어울린다. ⓒ 장태욱
 
북촌리는 제주시청 동쪽 약 20km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과거에는 북포리라고 부르던 마을인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북촌리(北村理)'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마을이 과거에 북포리로 불리던 것은 이 마을 북쪽에 있던 포구의 이름이 북포(北浦)였기 때문이다.

17세기 안핵겸순무어사로 제주에 왔던 이증(李增)이 남긴 '남사일록(南槎日錄)'에는 당시 이 일대를 순찰하면서 남긴 기록이 있다. 이증은 당시 조천관을 떠나 외포연대(조천읍 신흥리 소재), 사시포(조천읍 함덕리 서쪽 포구), 함덕포 연대(함덕 소재), 폐허된 강임사와 돌로 쌓은 긴 방죽, 서산봉수, 북포 등을 차례로 둘러봤다고 했다.

옛 군사 요새의 흔적들

이증의 기록에 나타난 '돌로 쌓은 긴 방죽'은 이 일대 해안에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환해장성을 이르는 것으로 보인다. 환해장성은 삼별초가 탐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고려 관군이 먼저 쌓기 시작했다. 후에 삼별초군이 고려관군을 물리치고 탐라를 장악하게 되자, 고려관군이 쌓던 환해장성을 삼별초군도 계속해서 쌓은 것으로 보인다.

   
▲ 환해장성, 고려 관군과 삼별초군이 제주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이다. 조천읍 해안가에는 환해장성의 흔적이 여러군데 남아있다. 이 일대는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공격할 때 주력부대가 상륙했던 곳이다.  ⓒ 장태욱
 
고려 원종 14년(1273년)에 여몽 연합군이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탐라를 공격할 때, 고려군을 이끌던 김방경은 이 일대 바다를 통해 섬에 상륙했다. 김방경은 풀을 가득 실은 배 30여 척에 불을 피워 명월포 앞으로 삼별초군을 유인한 뒤, 스스로 주력부대를 이끌고 이 인근 함덕포로 상륙했다. 군사의 수가 여몽연합군에 비해 턱없이 부족했던 삼별초군은 방어선을 내줄 수밖에 없었다.

조천읍 일대 해안가에는 환해장성의 흔적들이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북촌리에도 마을 동쪽 해안에는 환해장성이 약 500미터 정도 남아있다. 공교롭게도 환해장성이 남아있는 바로 서쪽에 지금은 전경부대가 들어서 있다. 과거 삼별초군이 그랬던 것처럼 전경대원들이 이 일대 해안을 방어하고 있다. 

▲ 서우봉 일몰, 서우봉의 옛 지명은 서산이었다. 북촌 해안에서 바라본 일몰 광경이다. 서산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일몰이 아름답다.  ⓒ 장태욱
 
기록에 나온 서산봉수는 서우봉에 있던 봉수를 말한다. 서우봉은 북촌마을의 서쪽에 있는 오름으로, 봉우리 서쪽은 함덕마을에 해당한다. '서산'이라는 옛 지명에는 북촌리 주민들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저녁에 서우봉 너머로 해가 지는 광경은 '서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황홀한 운치를 자랑한다.

서우봉 동쪽 해안, 여인들의 한숨이 남아 있는 곳

서우봉 동쪽 기슭에는 거의 정상에 이를 때까지 계단식으로 조그마한 밭들이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손바닥만한 밭마다 보리나 마늘 등이 자라고 있다. 과거 제주사람들이 농지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짐작하게 한다.

   
▲ 보리밭, 서우봉 정상 부근까지 계단식으로 밭이 이어진다. 고단했던 삶을 짐작할 수 있다.  ⓒ 장태욱

제주4·3 과정에서 최악의 비극을 연출했던 '북촌리 사건'의 현장이었던 '너븐숭이'도 서우봉 동쪽 해안 가까운 곳에 있다. 너븐숭이 서편으로 난 길을 따라 바다로 나가면 바다에 이르기 전에 조그마한 건물이 있다. 밖에 퇴악과 그물 망사리가 걸려 있어서 별다른 간판이 없어도 해녀들이 사용하는 탈의실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마을은 4·3이후 성인 남자들이 거의 씨를 감춰버린 마을이다. 바다와 오름 기슭을 터전삼아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 마을 여인들의 고달팠던 삶의 흔적들이 이 일대에 그대로 남아 있다.

▲ 해녀탈의실, 4.3당시 성인 남자들이 모두 죽게되자 삶을 지탱하는 것은 여인들의 몫이 되었다. 물질은 여인들의 고단한 삶을 상징한다.  ⓒ 장태욱
 
해녀탈의실 바로 앞에는 모자반, 톳, 미역, 우뭇가사리 등의 갈색 해초들이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현무암 대지가 펼쳐진다. 해녀들이 이 현무암 대지를 지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현무암 대지 위에 서니 이 마을 해녀들이 내뱉었던 한 서린 숨비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하다.

이증이 둘러봤다고 했던 북포는 지금은 북촌포구의 옛 이름이다. 포구의 생김새가 매우 독특한데다가, 바로 북쪽 가까운 곳에 있는 다려도와 어우러져 한결 아름답게 보인다.

정겹고도 사랑스러운 북촌포구

포구를 지키는 동서방파제는 다려도를 향해 북쪽으로 뻗어있다. 그 방파제의 안쪽에는 두 칸으로 분리된 포구가 있다. 바깥 칸과 안쪽 칸을 연결하는 좁은 목의 위로 연두색의 다리가 지난다. 누구의 아이디어로 만든 다리인지 모르지만 참으로 아담하고 사랑스럽다.

   
▲ 안쪽 칸 북촌 포구는 두 칸으로 되어 있다. 바깥 칸에서 안쪽 칸으로 들어오는 좁은 길목 위로 다리가 지난다. 아담하고 사랑스럽다. ⓒ 장태욱
 
포구에 오래된 낚시기구를 파는 가게가 있다. 이 가게를 운영하는 주인 부부가 마침 가게 앞에서 방금 낚아온 전갱이를 잡아서 회를 만들고 있었다. 초면임에도 염치불구하고 함께 젓가락을 들었는데, 쫄깃한 회가 씹힐 때만다 싱싱한 바다 향이 몸속으로 그대로 전해졌다. 오지랖이 넓어야 기행도 재미있는 법이다.

가게 안주인의 회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서 고향을 물었더니, 기대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서울 토박이에요. 몇 해 전까지 서울 살다가 다 정리하고 왔어요. 한번 정붙이면 떠날 수 없는 게 제주바다 아닌가요?"  
  

   
▲ 방금 잡은 전갱이로 만든 회다. 초면에도 체면 불구하고 옆에 끼어 젓가락질을 했는데, 정말 쫄깃하고 맛있었다.  ⓒ 장태욱
 
포구 주차장 동쪽에는 지은 지 30년쯤 되는 마을 휴게소가 있다. 이 휴게소를 지을 당시 주민들의 모금과 제일동포들의 후원으로 기금을 마련했다고 한다. 휴게소를 지으면서 포구로 통하는 진입로도 포장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이 휴게소가 포구를 근대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셈이다.

이 휴게소의 왼쪽에 사당처럼 보이는 조그만 기와 건물이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을 주민들이 모여 굿을 하는 '본향 기릿당'으로, 주민들에게는 정신적인 안식처다.

   
▲ 가릿 본향당, 포구 입구에 있는데, 주민들에게는 정신적 안식처이다.  ⓒ 장태욱
 
주민들은 이 당에서는 1월 14일에 신과세제, 2월 13일에 영등굿, 7월 14일에 백중제등 연중 세 차례의 굿을 올린다. 신과세제는 신년제이고, 영등제는 풍어를 기원하는 굿이며, 백중제는 가축의 번성을 기원하는 굿이다. 최근에 백중제는 참여하는 주민들이 많지 않아서 축원과 소지를 불사르는 정도로 간단하게 제를 있다. 하지만 신과세제와 영등굿은 지금도 성황을 이루고 있다.

연기를 피우는 등대에 왠 총자국?

휴게소의 오른쪽 뒤편에는 제주의 전통 등대인 등명대(일명 도대불)가 보존되어 있다. 등명대는 나뭇가지나 생선의 기름을 태워 항해중인 배에게 포구의 위치를 알리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북촌리 등명대는 표지석에 '대정(大正,1915년) 4년 12월 건립'이란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등명대에 건립연대가 표시되어 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이 등명대가 현재까지 제주에서 남아있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한다.

   
▲ 등명대는 과거 연기를 피워 포구의 위치를 알리던 등대였다. 북촌포구에 있는 등명대는 제주도에 남아 있는 등명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 장태욱
 
그런데 이 등명대는 건립당시의 모습대로 잘 보존되어 있는 반면, 표지석에는 총알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4·3당시 인근 함덕마을에 주둔했던 군인들이 남긴 흔적이다.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군인들은 북촌리를 빨갱이 마을이라 하며, 마을 어디에서든지 마구 총질을 해댔다고 한다. 동명대 표지석에 남아있는 총알 흔적도 당시 '광기에 불타던' 군인들이 남긴 것이다. <계속>

<제주의소리>

<장태욱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