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바라는 평화의 섬(1)] 임문철 신부, “평화 브랜드화는 평화에 대한 몰상식”

 지난 27일 노무현 대통령의 서명으로 제주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됐습니다. 50여년 전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4.3’으로 2만여명의 도민이 살육당하는 아픔을 당했던 제주가 평화의 섬으로 거듭난다는 것은 분명 기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자칫 평화의 섬은 우리 도민들에게 ‘공허한 구호’로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의 섬은 무엇인지, ‘제주의 소리’는 평화의 섬에 대한 각계의 의견을 싣습니다. 도민여러분의 적극적인 의견을 기다립니다. [편집자]
  

▲ 임문철 신부
제주가 평화의 섬이 되었다. 이 말만 놓고 보면 얼마나 경축할 일인가? 정말 우리 제주가 평화의 섬이라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나 평화의 섬은 대통령이 지정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선언한다고 평화의 섬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국가가 공식적으로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지정한 것은 지금 이대로의 제주가 평화의 섬이라는 뜻이 아니라 평화의 중개자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하고 지원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 지원과 선언은, 제주가 아닌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하더라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사업이며 적극 참여해야 할 사업임에 틀림없다.

십 수 년 전부터 제주 출신 학자들이 모여 제주를 발전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제주를 세계적인 평화의 섬으로 육성해 나가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아이디어 차원에서의 이런 이야기가 그동안 여러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갈고 다듬어져 구체화되었고 이제 그 결실의 하나로 대통령에 의한 세계 평화의 섬 지정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제주도로서는 ‘고·양·부’ 이래 가장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평화에 반하는 천박한 행태에 평화의 섬 지정이 서글픔으로 다가옵니다”

그런데도 왜 저 요란한 언론의 충동에도 감흥이 일지 않고 오히려 가슴 한 구석에 서글픔이 밀려오는 것일까? 그 첫째는 평화를 말하는 자들의 모습에서 평화에 반하는 천박한 행태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평화의 섬 지정을 기뻐하면서 이제 우리가 얄타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역이 되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게 되고, 관련 회의와 기구를 유치하게 되어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평화 자체를 탐구해 본 사람이라면, 경제적 이윤 추구를 위해 평화를 상품화한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공공연하게 평화 산업과 회의 유치를 말하고, 심지어 브랜드화 운운하는 것은 평화에 대한 몰상식이자 모독이다. 평화는 이용할 것이 아니라 이룩해야 할 그 무엇이다.

필자는 처음 평화의 섬이 제안될 때부터 이런 점을 지적해왔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는 격언대로 우리 제주인의 삶 안에 평화가 없다면 어떻게 세계에 평화를 줄 수 있겠는지를 물으면서 우리 안의 많은 갈등들을 해소하고 화합과 일치로 가기 위한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평화의 섬을 브랜드화 하자는 것은 평화에 대한 몰상식이자 모독”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의 섬을 제창한다면 그 의미는 우리가 사는 이 섬이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그 어느 곳보다도 필요로 하고, 평화를 갈구하고,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압박과 수탈, 소외로 얼룩진 유배의 땅이었던 조선조까지의 역사, 일제의 만행과 전쟁 동원, 그리고 저 참혹한 4.3의 기억은 평화의 반면교사가 된다. 그리고 그 ‘반평화’의 먹구름 사이로 끊임없이 떠올랐던 생존과 정의를 위한 항쟁들의 기억은 평화를 향한 인류의 꺼지지 않는 염원을 가르쳐 주는 교사이다.

그러나 그 두 가지만으로는 부족하다. 평화는 역사책이나 박물관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서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4.3의 비극을 딛고 화해와 상생으로 나아가는 모습과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하여 사랑의 감귤을 보내는 운동이다.

그러나 이 둘도 깊이 들어가 보면 안타까운 부분이 너무도 많다. 4.3과 관련해서는 일부에서 계속 북한의 지령에 의한 폭동을 주장하고 있으며, 피해자들이 명예회복과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초보적인 정의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정의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 화합과 일치를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내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사랑의 감귤 보내기 운동도 종교계와 시민단체가 시작했던 처음의 순수성이 많이 퇴색되어 정치도구화 된 면이 엿보인다. 2년 전에 있었던 남북평화축전 때에 도민들이 보인 무관심은 평화에 대한 우리의 현주소를 말해 준다. 지난 해 말 국가보안법 철폐에 관한 호응이나 환경보호에 관한 의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4.3은 북한 지령에 의한 폭동(?)…감귤보내기 운동 청치도구화 변질 우려”

평화란 무엇인가? 학문적인 정의는 어려울지 몰라도 필자의 견해로는 간단하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행복이라면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평화인 것이다.

개인을 말할 때 행복하다고 하고, 집안을 말할 때는 평안하다고 하고, 사회를 말할 때는 평화롭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더불어 행복한 사회, 모든 집안이 평안한 사회, 이것이 바로 평화인 것이다.

그러기에 평화의 섬을 위해서는 관료와 정치가, 학자는 조역이 되고, 탑동에서 노숙자들의 밥을 퍼주는 봉사자들, 독거노인들의 식사를 돌봐주고 말벗이 되어주는 푸드 뱅크 회원들, 무의탁 치매노인들의 손과 발이 되어주는 간병인들, 외로운 외국인 노동자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이들, 농약 한 번 치면 될 것을 손이 부르트게 호미로 김을 매는 유기농 농가들, 곶자왈을 살리자고 촛불을 켜든 환경보호자들, 4.3의 후유장애인들과 조작간첩의 억울함을 풀어주려는 인권지킴이들이 주역이 되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평화를 위한 일꾼이 되어야 할 종교인으로서 그 소명을 다하지 못하는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지정된 평화의 섬이 아니라 참 삶의 영역에서 평화를 건설하는 주역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임문철·중앙성당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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