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천리1] 창고천과 군산 그리고 검은 돌담, 발길을 돌릴수가 없네

   
▲ 군산 꼭대기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이다. 창천리는 안덕면의 동쪽 끝 마을이다.  ⓒ 장태욱
 
갈수록 여름이 일찍 찾아온다. 여기에 이상기온까지 겹쳐서 날씨가 제법 더워졌다.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리워서 창고천이 있는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로 갔다.

중문관광단지 서쪽 6km 지점에서 길은 제주시로 향하는 평화로와 대정으로 향하는 일주도로로 서로 갈리는데, 창천리는 그 갈림길에 있는 마을이다. 창천리는 안덕면 동쪽 끝 마을이기 때문에 서귀포시 중심부에서 안덕면으로 들어오는 길목이 된다. 창천리가 이 일대 교통의 중심지가 되는 이유다.

강위빙, 창천리 설촌의 아버지

창천리는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포시남마루'라고 하여 10여 가구가 사는 작은 동네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에 대정읍 상모리에 살던 강위빙이라는 선비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마을을 지나는 내에 창고처럼 생긴 바위굴이 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창고천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는데, 마을에는 강위빙의 설촌과 관련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강위빙은 상모리에 살던 강진의 장남이었다. 당시는 지방에 유향소를 두어 그 지역 출신 선비들로 하여금 지방 수령을 견제하거나 조언을 주는 일을 하게 했는데, 강위빙은 대정유향소의 책임자였던 유향좌수로 있었다.

그러던 중 1674년(현종 14)에 대정읍과 정의현의 경계에서 당시 순력 중인 제주목사(당시 제주목사는 절제사 '김흥운'이었다.)를 영접하게 되었다. 당시 강좌수의 허름한 행색에도 불구하고 제주목사는 강좌수의 인품 됨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목사 일행이 창고천 근처에 이르러 잠시 휴식을 취하게 되었는데, 이때 목사는 강좌수에게 지금 창천초등학교 북쪽 인근을 가리키며 "저곳에 집을 지어 살면 큰 부호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 창고천, 조면암질 암석으로 되어 있어 연중 물이 흐른다. 주변이 난대성 상록 활엽수들로 뒤덮여 있다. 마을 이름 '창천리'는 '창고천리'에서 유래한다.  ⓒ 장태욱

강위빙은 제주목사의 말을 듣고 이곳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오태연, 김두강, 오중방 등이 입주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설촌 후 마을은 지금의 창천리·대평리·상창리·감사리 동부와 중문면 상예리 2구 등이 포함된 광활한 면적을 거느리고 있었다.

18세기 정조 재임시 발행된 <제주읍지>에는 마을이 '창고내마을(倉庫川村)'로 기록되었는데, "대정현 동쪽 20리의 거리에 있다. 민호는 85, 남자는 204명, 여자는 257명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1910년에 상창리가 분리되고, 1914년에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서부는 감산리로, 상예2구는 중문면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남은 마을은 창천리로 개칭되었다. 또 1950년에 교통의 불편함을 이유로 대평리가 창천리에서 분리되었다.

한편, 창천리는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했던 권진응과 임관주의 유배지로도 알려져 있다. 창천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권진응은 자신의 집을 '창주정사(倉洲精舍)'라 부르며 제자들을 불러 모아 가르쳤고, 임관주는 계곡과 산을 두루 다니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곳에 머물렀던 유배인들

권진응은 송시열이 사약을 먹고 죽은 후 눈을 감겨 준 권상하의 증손자였다. 이런 인연 때문이라도 송시열에 대한 감호가 남달랐던 권진응은 유배가 풀려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송시열의 유배터를 방문한 후 지방 유생들을 불러 모아 송시열을 기념하는 비를 세울 것을 부탁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우암송선생적려유허비'인데, 이 비석이 제주시 오현단에 남아있다.

임관주는 산이나 계곡 암벽에 시를 짓기를 좋아했는데, 창고천 서쪽 암벽에는 지금도 임관주가 새겨놓은 마애시가 그대로 남아있다.

   
▲ 마을회관에서 바라본 군산의 모습이다. 웅장한 오름이 수문장처럼 남쪽에서 마을을 지키고 있다.  ⓒ 장태욱
 
마을의 이름이 창고천에서 유래했을 만큼 창고천은 창천리와는 떼어놓을 수 없다. 이 하천은 돌오름 인근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20km를 지나 화순 해안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조면암질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제주에서는 드물게 사철 물이 흐른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 하천 인근에는 논농사가 번성했다고 하는데, 이는 창고천이 용수를 풍부하게 공급해 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마을을 상징하는 창고천과 군산, 그리고 소박한 마을 안길

창고천에는 구실잣밤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동백나무, 감탕나무, 담팔수 등 천연 난대 식물들이 왕성한 서식하고 있다. 게다가 계곡물에는 민물게, 민물장어, 새우, 송사리, 잉어, 붕어 등이 서식한다. 그렇기에 창고천은 주민들에게는 생활용수를 공급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추억을 만드는 공간이 되기도 했다.

창천 마을의 정남쪽에는 웅장한 오름이 수문장처럼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 '군산'혹은 '굴뫼'라고 부르는 오름인데, 창고천과 더불어 마을을 상징한다.

마을에 전해오는 설화에는 이 오름이 스승의 은혜의 보답하기 위해 동해용왕의 아들이 뇌우를 동반하여 만든 산이라고 한다. 1007년(고려 목종10년)의 기록에는 탐라에서 새로이 서산(瑞山)이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서산이 지금의 군산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 마을 안길에서는 콘크리트 벽을 보기 어렵다. 검은 돌담을 뒤덮은 송악 넝쿨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 장태욱 
 
창천리는 제주 서남부권의 교통의 요충지임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 안길은 오래 전 모습은 잘 간직하고 있다.

마을 안길 어디를 걸으나 검은 현무암 돌담이 알맞은 높이로 있고, 오래된 송악 넝쿨이 검은 돌담을 뒤덮고 있다.

송악 넝쿨 줄기의 두께로 보아 나이가 많은 것들임에 틀림이 없다. 편리하다고 콘크리트로 벽을 쌓기를 좋아하는 세태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은 그간 돌담을 헐고 콘크리트 벽을 쌓는 토목공사를 자제해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을 안쪽에는 뉘 집인지 모르나 뒤뜰에 늙은 하귤 나무 한 그루가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귤이 탐스럽기 그지없다. 소박한 집인데, 귤나무 한 그루가  기품 있게 서 있으니 주인이 부러워졌다.  

   
▲ 마을을 지나다가 본 하귤이 있는 농가다. 나무의 키를 보아 100년은 넘어 보이는 나무인데, 가지마다 주렁주렁 달린 하귤이 탐스럽기만 하다. 뉘 집인지 모르지만 정겨움에 반해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 장태욱
 
지금은 마을에 244가구에 651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주민들 대부분은 귤, 키위, 콩, 보리 등을 재배하면서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창천리 오동근(48) 이장을 만났다. 이동근 이장은 부인과 함께 1남 2녀를 거느린 가장으로, 귤·키위·콩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금년에 이장에 선출되어 내년까지 이장직을 맡게 되었다.

인구유출, 농촌이 피해갈 수 없는 운명

"창천리는 마을의 출발부터가 선비의 마을입니다. 그 때문인지 마을 출신들 중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젊은이들 대부분이 농촌을 떠나기 때문에 초등학교 존립조차도 어려운 형편입니다."

   
▲ 창천리 오동근 이장 귤, 키위, 콩 등을 재배하는데, 올해 이장에 선출되어 내년까지 이장직을 맡는다. 젊은이들의 유출과 그에 따른 초등학교의 존립문제를 가장 걱정스럽게 생각한다. ⓒ 장태욱 
 
마을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은 대부분 농촌들이 처한 현실이다. 창천리도 선비의 고장이라 하지만 그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는 모양이다. 그런 어려운 여건 하에서도 마을에 자랑할 만한 일들이 있다고 했다.

"우리 마을이 최근에 '농어촌 건강 장수마을'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그로인해 3년간 매해 5천만 원씩 지원되고 있습니다. 그 돈으로 노인건강관리실, 서예교실, 체조교실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수익사업으로 어르신들이 콩을 재배하시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서귀포 시청이 주도해서 창고천 중류에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 공원이 조성되어 잘 홍보되면 마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나타내었다. <계속>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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