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경의 일본야구 A to Z] 도쿄 야쿠르트 스와로즈

도쿄 야쿠르트 스와로즈(東京ヤクルトスワロ―ズ) Tokyo Yakult Swallows

· 명칭의 유래 : 스와로즈 'Swallows' 는 제비. '제비' 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는 1950년 창단 오너인 국철(國鐵, 한국의 철도청 해당)의 가장 빠른 특급열차 이름이 '제비호' 에서 연유한다.
· 본거지 : 도쿄(東京)
· 홈 구장 : 메이지 진구 구장(明治神宮野球場)
· 오너기업 : 주식회사 야쿠르트 본사 (요구르트를 중심으로 한 식품, 약품, 화장품)
· 창단 : 1950년
· 센트럴 리그 소속, 리그 우승 6회, 일본 챔피언 5회

1950년, 일본 프로야구계는 새로운 구단들의 창립 붐이 일어난 때였다. 여기저기서 새로운 구단들이 창립되면서 아마츄어 야구단을 가지고 있었던 꼬쿠테쓰(국철, 國鐵, 한국의 철도청에 해당)는 선수들이 프로로 빠지는 바람에 해단 위기에 빠졌다. 또 철도청 직원들의 사기함양을 위해서 창단된 프로야구단이, 꼬쿠테쓰 스와로즈(國鐵スワロ―ズ) 였다. 그후 15년간 특별한 성적 한번 올려보지 못하고, 1965년 구단 경영권은 '꼬쿠테쓰'에서 후지산께이 그룹(후지텔레비, 산케이(産經)신문)으로 넘어갔다.

경영권이 바뀌면서 이름도 '산께이 스와로즈', 이번엔 소년 야구팬들을 모은다고 '산께이 아톰'으로 어줍지 않은 이름을 붙치고 다니더니, 5년도 못가서 지금 '야쿠르트'로 또 경영권이 넘어 갔다.

1973년이 되어서야, 겨우 지금의 이름 '야쿠르트 스와로즈'로 정착이 되었으며, 프로야구팀 같은 구단으로 정비되어 갔다. 팀 창단 30년간, 매년 리그 밑바닥의 성적을 헤매던 구단이 1978년 첫번째로 리그 우승을 하면서, 일본 챔피언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도 어쩌다가 1년, 그후 또 밑바닥을 해매는 팀이 되고 만다.

▲ 노무라 카츠야 前감독 ⓒ제주의소리
이러던 팀이 1990년부터 바뀌는 것이다. '야쿠르트' 하면, 2사람이 얼굴이 떠오른다. 한사람은 노무라(野村) 감독이며, 또 한사람은 후루타(古田) 선수이다.

1990년부터 노무라 감독이 취임, 지휘를 잡게 된다. 팀이 완전히 바뀌어진다. 노무라 감독은 1990년, 그의 나이 55세때 야쿠르트 감독으로 취임, 9년간 장기집권을 하게 된다. 9년간의 장기집권이 가능한 것은 성적이 좋았기 때문이다. 리그 우승 4회, 일본 챔피언 3회를 하는등, 항상 우승 다툼을 하는 팀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노무라 감독은 그의 지론인 ID 야구, 즉 관리야구를 철저히 도입했을 뿐 아니라, 다른 팀에서 쓸모없다고 버린 선수를 모았다. '노무라 재생공장' 이란 별명을 만들면서 새로운 선수로 탈바꿈 시켜 써 먹기로 유명했다.

그의 나이 55세부터 64세까지의 감독으로서는 최적령기, 그가 생각해 온 야구 철학 및 이론을 실제로 팀에 도입, 그 결과 좋은 성적을 얻고 완전히 물찬 제비가 되여, 일본 야구를 좌지우지하는 최고 어른이 되었다.

그가 야쿠르트 감독을 퇴임할 때는 성적이 나빠서 퇴임한 것이 아니라, 후배를 위한 용퇴인 것이다. 그는 야쿠르트 출신이 아니었다. 야쿠르트 출신으로 야쿠르트에서 잔뼈가 굵은 후배(와가마쓰, 若松) 에게 감독직을 물려 준것이다.

▲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前감독(2006년~2007년, 선수 겸임)ⓒ제주의소리
후루타 아쓰야(古田 敦也,ふるた あつや、1965년생) 씨는 야쿠르트 팬 뿐만 아니라, 일본사람전체로 부터 사랑을 받으며, 또 '후르타' 라는 이름을 모르는 일본사람은 없다. 관서(關西)지방 출신으로서, 리쓰메이간(立命館) 대학 졸업후, 실업야구 '토요타' 를 걸쳐 1989년에 야쿠르트에 입단했다.

캐쳐로서 안경을 쓰고 있어서 프로에서는 어렵다며 다른 구단은 별 볼일없는 선수로 봤으나, 야쿠르트에 입단후 캐쳐 출신 노무라 감독의 눈에 들기 시작한다. 캐쳐 포지션에 앉을때 궁둥이가 땅이 닿을까 할 정도로 무릅 관절이 너무 좋은 것. 또 어깨가 감독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명캐쳐 명감독 노무라의 수제자가 되며, 철두철미한 수재 교육과 스파르타 교육으로, 수비에서는 명캐쳐로, 공격에서는 수위타자가 되는등, 명타자로 성장하며 꽃이 핀다.

야쿠르트 공격 때 노무라 감독은 벤치에 항상 후루타를 자기 옆에 앉게 했다. 그리고는 중얼중얼 무어라고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해댄다. 게임 운영의 자기 의견을 항상 쉴세없이 중얼중얼 무어라고 한다. 그 중얼
중얼을 듣고 배워서 수비 때 캐쳐로서 선수들을 지휘하라는 것이다. 노무라 감독 본인의 야구에 대한 철학과 의견을 후루타라는 선수를 통해서 그라운드로 내 보내는 것이다.

노무라의 ID야구가 캐쳐 '후루타' 를 통해서 그라운드에 충만 해지면서 야쿠르트 스와로즈는 물찬 제비가 되어 좋은 성적을 올린다. 노무라 감독과 후루타 캐쳐가 페어가 되어 활약한 9년간, 야쿠르트는 리그 우승 4번 일본 챔피언 3번을 하게 된다. 노무라 감독이 감독을 그만둔 후에도 선수들이 질문은 다음 감독(와까마쓰,若松)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후루타 선수에게 질문을 해서 조감독이란 별명까지 붙었다.

그가 일본사람들에게 더 널리 사랑받을 일이 생겼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 프로야구 선수회'의 선수회장을 염임하게 된다. 프로야구 선수들의 노조 회장과 같은 역할이다. 이때 선수회를 이끌어 구단측들과 싸움도 했고 또 스트라이크도 거행, 경기를 보이콧 하는등, 지금까지 볼수 없었던 선수 노조 활동의 회장노릇을 톡톡히 해 냈다. 이때, 일반시민들은 경영자인 구단측보다 노동자격인 선수들의 편에 서서, 후루타의 일거수 일투족을 쳐다보며 박수를 보내곤 했다. 후루타 선수가 아닌 후루타 회장으로서 일본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만들어 놓았다. 누구도 후루타 회장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후 2006년과 2007년은 선수겸 감독을 했으나,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좋은 성적을 올리지 못했다. 선수겸 감독 또한 역시 노무라 감독 이후 처음으로 생긴 일이다. 노무라 감독 역시 감독겸 선수를 한 사람이다.
한국의 임창용선수가 지금 뛰고 있는 야쿠르트, 최고의 전성기는 역시 노무라 감독과 후루타 캐쳐가 페어가 된 1990년부터 9년간 이었다. 그때와 같은 물찬 제비는 아마도 앞으로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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