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경의 일본야구 A to Z]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福岡ソフトバンクホ―クス(ふくおか ソフトバンク ホ―クス、Fukuoka SoftBank Hawks)
·후쿠오카(福岡)는 규슈(九州) 제1의 도시, 한국 부산과 아주 가까운 도시다.
·홈 구장 : 후쿠오카 돔
·본거지 : 후꾸오카
·오너기업 : 소프트 뱅크(휴대전화를 중심으로한 정보통신)
·오너 : 孫正義(일본 태생 제일동포로 일본인으로 귀화. 귀화 할 당시 한국인임을 남기기 위해 한국 성 '손(孫)'을 사용. 본인은 떳떳이 한국인 재일동포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음.)
·창단 : 1938년
·퍼시픽 리그 소속, 리그 우승 15회, 일본 챔피언 4회(2008년시즌 종료까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는 전통의 팀이다. '巨人 쟈이안트' 가 일본 야구를 리드하고 센트럴 리그를 리드해 왔다면 후쿠오카 소프트뱅크는 퍼시픽 리그를 리드해 온 구단이다.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구장. ⓒ위키피디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의 전신은 '난카이(南海)호크스'였으며 본거지는 오사카(大阪)였다. 1989년 '난카이'에서 '다이에'로 구단이 넘어갔고 또 2004년말 '다이에'에서 '소프트뱅크'로 넘어가서 현재의 '소프트뱅크 호크스'가 되었다. 1938년 '난카이 호크스'가 창단된 이래 1989년 '다이에'로 넘어가기까지 50년간 오사카(大阪)가 본거지였다. 그 사이 일본 프로야구 오사카의 터줏대감 노릇을 톡톡히 해 왔다.

1989년 '다이에'로 넘어가면서 본거지도 규슈의 후쿠오카(福岡)로 옮겨져 지금까지도 유지돼 오고 있다. 지금도 오사카 사람들은 '소프트뱅크 호크스'를 '우리동내 팀'이라고 느낀다. 1938년 창단이후 50년간, 이 '난카이 호크스' 시절의 역사와 전통이 일본 프로야구를 리드해 온 것이다.

지난 50년간 구단을 가지고 있었던 난카이(南海)는 전철회사이다. 오사카 남쪽을 중심으로 철도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오사카 관서공항에서 시내까지의 철도노선을 가지고 있다. 그 공항노선을 설치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적자였던 구단을 '다이에'로 넘겼다.

1989년부터 구단을 맡은 '다이에'는 슈퍼마켓 회사이다. 일본 최초로 '다이에'라는 상호로 슈퍼마켓을 전개, 성공했다. 그런데 이 '다이에'도 경영난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2004년에 '소프트 뱅크'로 넘어갔으며, 당시 구단 양도액이 200억엔이었다고 한다. 실제 일본 프로야구구단 가격을 알만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친 구단이 지금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이다.

호크스 팀에서는 3사람의 얼굴이 떠오른다. 츠루오카 감독, 노무라 감독, 왕정치(王貞治) 감독이다.

▲ 쯔루오까 가즈오 감독(가운데).
츠루오카 감독과 노무라 감독은 옛날 오사카(大阪)의 난카이(南海) 시절의 얼굴이다. 왕정치 감독은 현재 소프트뱅크의 얼굴이다. 이 팀 감독들은 다른 팀들과 좀 다른 점이 있다. 츠루오카가 23년, 노무라가 8년, 왕정치가 14년을 각각 감독직에 있었다. 구단 70년간의 역사에 이 세 감독이 45년간 감독을 했다.

츠루오카 가즈도(鶴岡 一人, つるおか かずと, 1916년생∼2000년 만83세로 사망, 별명은 '오야붕')은 난카이의 얼굴이었다. 히로시마(廣島) 출신으로서 법정(法政)대학을 졸업, 1939년 난카이에 입단, 3루수 3번타자로 활약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다. 얼마나 탁월한 리더십이 있었는지 입단 1년째 그를 주장으로 올렸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면서 군대에 징집, 중대장을 하게 된다. 중대장을 하면서 그는 또 지휘관 철학을 터득한다. 전쟁이 끝난 후 1946년 다시 난카이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선수겸 감독을 7년간 했고, 그후 감독으로만 1968년까지 23년을 역임했다. 감독 취임 첫해에 리그 우승을 했다. 그의 나이 29살때에 선수겸 감독으로 우승을 한 것이다. 23년간에 리그 우승11번, 일본챔피언 2번을 기록했다.

'감독을 한사람이 너무 오래 하고 있으면 그 조직은 발전할 수 없다' 는 말을 남기며 수석 코치에게 감독자리를 물려주고 용퇴를 했다. 그런데 감독 자리를 물려받은 수석코치가 4일만에 사망하고 마는 사건이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다시 감독자리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후 그는 3년간 더 감독을 했다.

당시 일본은 전쟁이 끝나서 상당히 생활이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는 선수들의 생활, 사생활까지 꼼꼼히 챙기기로 유명했다. 또 덕망이 높은 어른으로서 자기 구단 선수 및 야구관계자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의 문하생들은 후에 야구계의 중진들이 된다. 현재 활약하고 있는 명감독 노무라, 유머로 한몫하고 있는 오오사와(大澤) 전감독 등 각계각층에서 활약하고 있다. 52세의 나이로 감독직을 그만둔 후 다른 구단의 감독을 모두 마다하고 오직 난카이 팀만을 바라보고 난카이 팀의 어른으로서 팀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이 된다.

노무라 감독은 지금 부인과의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하다. 츠루오카가 구만두고 다음 감독으로 노무라 감독이 선수겸 감독으로 취임하였으나 노무라 감독의 지금 부인이 팀에 관여를 하는등의 말썽이 일어나 곧 그만두게 된다. 노무라 감독은 '츠루오카 영감이 내 목을 도망가게 했다' 라고 말하곤 했다.

23년간 감독을 하면서 승률(이긴 경기 : 진 경기의 비율)은 6할을 넘었다. 이 승률은 일본 최고 기록이므로 명장인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왕정치(王貞治) 감독은 누구나 다 아는 것처럼 요미우리 자이안트의 얼굴이다. 선수로는 세계의 홈런왕 등 대선수로 활약했다. 은퇴 후 1984년부터 88년까지 요미우리 자이안트의 감독을 지냈다. 그후 1995년부터 2008년까지 14년간 '다이에 호크스'로 시작,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을 했다. 그간 리그 우승 5번, 일본 챔피언 2번을 해냈다. 감독직 처음의 3년간을 B클래스에서 보냈고 그 후는 계속 A클래스를 했다. (시즌이 끝난후, 리그 6개 팀중 상위 1·2·3위의 팀을 A클래스, 하위 4·5·6위 팀을 B클래스로 구분함. 팀의 성적을 구분하는데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음.) 2006년 제1회 WBC 일본감독을 역임하고 우승까지 해 냈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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