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경의 일본야구 A to Z] 오릭스 바파로스

오릭스 바파로스 (オリックス·バファロ―ズ, Orix Buffaloes)
·홈 구단: 오사카 돔 (교세라 돔 오사카). 본래 이름은 '오사카 돔' 이었음. 교토(京都)에 있느 기업 '京세라미타' 가 명명권(命名權 : 돈을 받고 이름을 사는 권리)을 사서 계약기간 동안만 '교세라 돔 오사카'로 이름을 바꾸고 있다.
·본거지: 오사카
·오너기업: 오릭스(금융업. 리스, 투자, 부동산, 보험등 금융 종합 회사)
·창단: 1936년
·퍼시픽 리그 소속. 리그 우승 12회. 일본 챔피언 4회 (2008년 시즌 종료까지)

지금의 '오릭스 바파로스'는 1936년 '한큐(阪急) 브레이브스(Braves)' 라는 이름으로 창단 된 구단이다. 본거지는 오사카(大阪) 였으며 한큐(阪急) 라는 회사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철도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철도회사 이다. 지금도 철도사업은 성업중이다.

1988년 말에 약 50여년 역사의 '한큐'는 '오릭스'에 넘어가서 1989년부터는 '오릭스 브레이브스' 가 된다. 1991년부터는 본거지를 오사카에서 고베로 옮기며 구단 이름도 '오릭스 브레이브스'의 '브레이브스' 를 빼고, 항구도시 고베(神戶)에 맞는 '블루 웨이브 (Blue Wave)'로 바꿔 완전한 '오릭스 블루 웨이브'로 탈바꿈 한다.

▲ 오릭스 버팔로스 돔 ⓒ구글사이트
홈 구장도 지금까지의 니시노미야 구장(西宮 球場)에서 '그린 스타지움 고베'로 옮겼다. 1995년1월에 고베(神戶)에서는 사망자 5천명 이상의 전멸에 가까운 어마어마한 대지진이 일어났다. 같은 해 '오릭스 블루웨이브'는 「がんばろう KOBE, 힘냅시다 고베」라는 캐치 플레이즈를 걸고서 가족이 사망한 사람, 집이 무너져 오갈데 없는 사람들과 동고동락하는 팀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 냈다.

그해 1995년 팀은 리그 우승을 해 낸다. 리그 우승을 결정한 그 경기가 끝났을 때, "고베가 울었다" 란 말이
나왔고 고베 사람은 물론 고베에 가까운 관서(關西)지방 사람들도 다 같이 눈물을 흘렸다.

2004년은 일본 프로야구 역사에 있어서 어지러웠던 1년이었다. 퍼시픽 리그 전통의 팀 '오사카 긴테스 바파로스(おおさかきんてつバファロ―ズ、Osaka Kintetsu Buffaloes)'의 오너 기업, '긴테스'가 구단 경영을 못하겠다고 손을 들고 만 것이다. '긴테스'는 오사카를 중심으로 철도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1980년대 버블 경제 때 부동산 등에 손을 잘못 대 골치 아파진 것이다. 해봐도 해봐도 적자를 내는 프로야구 구단을 내 놓은 것이다.

이 '긴테스 바파로스'와 '오릭스 블루웨이브'가 합병을 한다. 합병이 아니라 자금력이 있는 '오릭스'가 흡수 한 것이다. 오릭스는 그래도 의리가 있어서 '긴테스 바파로스'의 '바파로스'는 그대로 사용해 '오릭스 바파로스'로 바꾼다. 그래서 '오릭스 바파로스'는 2005년부터 정착하게 되며 본거지도 고베에서 오사카로 옮겼다. 그러나 2개팀이 하나로 합쳐졌으니 선수도 2배로 늘어난다.

'긴테스'가 없어지면서 퍼시픽 리그는 6팀에서 5팀으로 구단 하나가 줄어든다. 이때 프로야구를 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온 기업이 라크텐(樂天) 이었다. 선수가 2배로 늘어난 오릭스는 새로 프로야구를 하겠다는 '라크텐'에게 늘어난 선수를 나눠 준다. 나눠 주면서도 그냥 기분좋게 나눠 준 것이 아니라 좋은 선수들을 먼저 오릭스가 가지고 나머지 선수를 데려가라는 식으로 해 지금의 '라크텐 이글스(樂天 Eagles)'가 된다. 그러나 좋은 선수만 골라서 가진 오릭스는 그 후에도 별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 구대성 ⓒ구글사이트
구대성 선수가 플레이 한 구단이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간 재적 했다. 4년간 24승 34패, 방어율 3.86 이었다. 특히 2002년은 22경기에 등판, 방어율 2,52 이면서 5승 7패를 했다. 방어율 2.52라면 상당히 잘 던진 성적으로 보통이라면 10승이상의 승수를 올렸을 것이다. 이때 오릭스의 타격이 엉망이라서 구대성 선수가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오릭스의 전신 '한큐 블루베이스'에는 한 선수의 얼굴이 떠오른다. 후쿠모토 유타카(福本 豊, ふくもと ゆたか 1947年생, 외야수)다. 오사카 출신으로 현역 때는 발로 야구를 했고 선수를 은퇴 한 이후로는 말로 야구를 하고 있다. 별명이 '세계의 도루 왕, 후추모토 유타카' 이다.

고등학교를 졸업, 마쓰시다(松下)전기에서 아마츄어 야구를 했지만 그리 알려진 선수는 아니었다. 아마츄어에서도 발이 빠른 것은 알아 주었지만 키가 작았다(169cm). 1968년말 드래프트 7위로 한큐에 입단 했으니 큰 기대를 하고서 뽑은 선수는 아니었다.

1969년부터 1988년까지 20년간, 연간 도루왕 13번, 최다 안타(연간 안타 숫자로 제일 만이 친 선수)를 4번 했다. 최다 안타 4번은 '이치로'가 깨기까지 일본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의 통산 도루 숫자는 1065개로 일본 기록이면서 세계기록이다. 최고 많을때는 연간 106 도루를 했고 이것 또한 연간 도루 세계기록이다.

또 다른 일본기록으로는 3루타 기록이다. 3루타는 홈런보다 만들기 어렵다. 발이 빨랐기에 2루타를 치고도 3루타를 만드는 것이다. 평생 2543안타를 쳐서 야구전당에 들어가 있다. 평생 2543안타는 역대 5위에 올라가
있고 2루타는 역대 2위에 올라 있다. 일본 최고 1번타자 선수로서 기록및 기억에 남는 선수로서 최고다.

▲ 후쿠모토 유타카 ⓒ구글 사이트
후쿠모토가 출루하기만 하면 2루로 도루, 2번 타자는 번트를 대서 후쿠모토는 3루, 3번 타자는 후라이 하나로 1점. 이런 식으로 1점 방정식을 만들었다.

발이 빠르기도 했지만 연구 열심으로도 유명하다. 투수의 투구 모션을 연구해서 도루 할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다. 제일 많이 가지고 놀아버린 투수가 '세이브'의 '히가시오(東尾)' 투수였다. 어찌나 당했는지 히가시오 투수가 졸졸 따라 다니면서 자기 투구 모션에서 어디가 나쁜지를 가르켜 달라고 안달 안달 졸라대는 것이다. 가르켜 주고 말았다. 곧 나쁜 모션은 고쳐졌다. 그러나 도루는 계속 성공하는 것이다.

후에 이야기 하기를 '나쁜 모션 하나가 고쳐지더니 이제까지 없던 다른 나쁜 모션이 하나가 나오더라'는 말로 유명하다. 히가시오 투수는 2번 당한 셈이다.

상대팀 캐쳐들의 골치는 아만저만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1루로 악송구 해서 2루로 뛰게 한 후 2루에서 아웃 시키는 방법까지 연구 한다. 물론 이때 1루 악송구는 계산되고 연습된 악송구 였으니 악송구 된 자리에 수비가 미리 들어가 있어서 볼을 빨리 2루로 던질수 있고 또 아웃 시킬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없었다.

제일 많이 골치 아팠던 캐쳐는 노루라 감독의 현역시절 이었다. 1988년말까지 선수를 하고 은퇴를 했다. 은퇴를 한 이후에도 오사카를 떠나지 않고 계속 오사카에 살고 있다. 코치도 몇번 했지만 오사카에 있는 팀만 코치를 했다(오릭스와 한신타이거스).

TV 야구 중계의 방송해설자로 이번엔 말로 야구를 하기로 유명하다. 그는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에서 성장했고, 아마추어 야구도 '마쓰시다 전기' 였다. 마쓰시다 전기는 오사카 기업이다. 그 후 오사카의 한큐에 입단했기에 오로지 '오사카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오사카 사투리는 아주 구수하고 독특하다. 야구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TV방송을 통해서 보더라도 TV방송에서 후쿠모토씨 처럼 오사카 사투리를 구수하게 또 재미있게 구사하는 사람이 없다. 한마디씩 하는 오사카 사투리가 코메디에서도 인용 되는가 하면 또 오사카에서 유행어까지 되기도 한다. '후추모토 어록' 까지 있다. 그야말로 말로 야구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의
구수한 사투리로 인하여 오사카 사람들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오사카의 보배'라고 칭송하는 사람까지 있다.

지금의 '오릭스', 또 오릭스에 흡수된 '긴테스'에서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오오기 아키라(仰木 彬, おおぎ あきら,1935년생 2005년 만 70세로 사망) 감독이다. 규슈(九州) 출신으로서 니시테스(西鐵)에서 선수(2루수)를 했다. 1970년에 긴테스의 코치로 들어와 계속 코치를 하다가 1988년부터 감독으로 승격, 92년까지 5년간 감독을 했다. 코치 및 감독으로서 23년간을 긴테스에 있었던 것이다. 선수보다 더 오래 코치및 감독을 한 것이다. 이때 리그 우승 한번을 했다.

그후 1994년부터 오릭스의 감독으로 취임, 2001년까지 8년간 감독을 했다. 이때 리그 우승 2번, 일본 챔피언 1번을 했다. 리그 우승 2번 중 한 번이 1995년 고베 지진 때였다. 그 당시 고베는 물론 일본을 울게 만들었다.

2001년에 감독을 용퇴 했지만 그후 오릭스는 계속 밑바닥을 맴도는 팀이 되고 만다. 그래서 구단은 또 다시 오오기 감독에게 감독을 맡아주기를 요청, 2005년 1년간 또 감독을 했다. 2005년때의 감독 취임때는 나이도 70세 또 폐암 말기 때였다. '야구인으로서 그라운드에서 쓰러지고 싶다' 라는 말을 하면서 감독을 맡게 된다. 마지막 감독 때는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하는가 하면 계단을 올라가지도 못하는 광경이 보이게 된다. 시즌 종료 2개월만에 사망했다.

노무라 감독은 노무라 재생공장으로 유명하다면, 그는 좋은 선수를 발굴해서 세계적인 명선수로 키우기로 유명했다. 그의 눈에 들은 명선수로는 일본및 미국에서 플레이 한 노모 투수, 이치로 선수등이다.

노무라 감독과는 다른 얼굴로 보이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인자한 신사의 얼굴에 멋쟁이 스타일 이다. 나이에 걸 맞지 않게 펀치 퍼머를 하기로도 유명했다. 그런데 그 펀치 퍼머가 어울렸다. 일본사람 이라면 누구도, '오오기 감독' 이라는 말에 그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어 놓고서 천국으로 가버린 명장이요, 지장이었다.

지금의 오릭스 하면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다. 이치로 선수다. 본명은 스즈키 이치로(鈴木 一朗, すずき いちろう) 이며, 1973년생이다. 1991년말에 드래프트4위로 오릭스에 입단, 초기에는 별로 빛도 없는 선수 생활을 했다. 1군에도 정착하지 못하면서 1군과 2군을 왔다갔다 하는 1.5군 선수였다.

스승를 잘 만나면서 빛을 보기 시작한다. 타격코치 아라이 히로마사(新井宏昌, 한국명 박종률)를 만나면서 지도를 받기 시작한 것. '아라이 히로마사' 코치는 재일동포다.

이치로는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에 많이 알려진 선수이다. 아직도 나의 머리속에서 잊을 수 없는 것은 2006년 제1회 WBC에서 한국에 깨진 후 벤치에서 그가 행한 행동이다. 스포츠 선수로서, 또 인간으로서 빵점이었다. 이제까지 무수한 야구경기를 봐 왔지만 경기에서 패한 후 행한 행동으로는 이치로가 최저였다.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 바로 그 모습이었다.

이치로는 재능있고, 또 잘하고 있는 선수이다. 그래서 좋은 기록을 갱신하고 있고, 또 만들고 있다. 선수로서는 대성했고 지금도 대성하고 있다. 어느 선수도 그렇듯이 선수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야구선수가 아닌 야구인으로서의 많은 기간이 남아 있다. 나는 많은 야구인들의 길을 봐 왔다. 역시 훌륭한 야구인들은 선수로서의 기록만큼, 인간적인 성품이 그를 평가하고 있다. 홈런 기록을 남긴 왕정치(王貞治)도, 투수에서 기록 및 기억을 남긴 이나오(稻尾)도, 선수로도 유명했지만 인간적 성품으로도 유명했기에 영원히 일반사람들 머리속에 기억되고 있었다.

이치로 선수, 그는 어떤 인간으로서의 매력을 풍길런지, 앞으로도 계속 주목해서 보고 싶다. 마지막으로 충고도 한마디 하고 싶다. 너무 속 좁게 놀지말고, 좀더 넓게 놀면 일본의 스타는 물론이요, 아시아의 스타도 될수 있다, 라는 말을 하고 싶다.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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