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영의 뉴욕통신] 고통과 슬픔을 넘어서...

마이클 젝슨(50)을 모르는 사람이 지구상에 있을까?

나는 1979년 3월 미국에서 '망명아닌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교내 카페(식당)에서 접시ㅤ닦기부터 시작했다.

접시ㅤ닦기의 파타임 수입이 한국에서의 전임강사 봉급보다 못지 않게 많았다. 기숙사비와 교재비 그리고 다음 학기 등록금도 충당할 정도였으니까...

방학때면 뉴욕 시내 인도 한 귀퉁이에서 행상도 했다. 슬럼가에서 허름한 가게를 사서 한 1년 정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뛰어 보기도 했다.

그때 나의 가게의 조그만 수입이었지만, 거의 절반 이상의 매상을 올려 주던 한 아이텀이 있었는데, 마이클 젝슨의 노래하는 모습 사진들이었다. 한 장에 소매가 1불 정도 했다. 한 장씩 팔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조그만 앨범을 별도로 구입해서 10장을 무더기로 팔기도 했다.

맨해튼 브로드웨이 한인 도매상들은 밤새 불법 복사하여 공급하기도 했다. 워낙 공급이 딸리니까...

그러나 잘 나가던 마이클의 사진들은 하루아침에 모두 쓰레기 통으로 가야 했다. 인기의 절정이란 것이 그런 것이었다. 거져 주어도 아이들이 가지려 하지 않았다. 왠지 그 이유는 아직도 미스테리다.

어제는 뉴욕시내 거주하고 있는 나의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가는 길에서 마이클의 사망 원인을 뉴스로 들었다. 부검한 결과가 곧 나올 것이라면서, 현재로써는 타살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처방약을 너무도 많이 먹는다는 것이 화근인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데메롤'이라는 주사약을 처방받아 맞고 있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아편'이다. 진통효과가 좋다. 그러나 습관성 약품이다. 속칭 '중독성'이 강하다.

오래전 군대생활을 하면서 겪은 나의 경험으로는 환각작용도 크다.

조그만 국부수술을 받고 있었는데, 보통의 프로케인(국부마취제)으로는 진통 효과가 없어서 통증을 호소했더니만, 군의관이 당장 데메롤 한 알을 입에 넣어 주었다. 그 통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수술대가 붕하고 하늘로 떠 오르는 그런 착각을 느꼈다. 생살을 도려내는데도 별로 아픈 감각이 없었다.

마이클이 부유하게 살고 있었지만, 그의 몸과 맘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 도사리고 있었나 보다.

그 고통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여 '약'에 의존하여 살아야 했다. 얼마나 힘든 생활이었을까?그냥 상상만 해 본다.

▲ 이도영 편집위원
가진 것이 많다고 꼭 행복한 것은 아닌가 보다.

당대의 한 '풍운아'가 졸지에 갔다.

한때 나의 배고픔을 달래 주던 마이클 이제사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부디 안녕을...

만리 이역의 한 나그네가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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