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도가 어디꽈] 건포배은(巾浦拜恩)을 곱씹으며

건포배은(巾浦拜恩>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 중에는 「건포배은(巾浦拜恩)」이라는 그림이 있다. 그림을 보면 하단에는 제주의 유생 및 관리 300명이 일부는 관덕정 앞에서, 다른 일부는 건입포에서 북쪽을 향해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는 절을 올리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상단에는 마을 곳곳에 있는 신당(神堂)이 불타오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형상 목사는 조선 숙종 때 제주에 부임했던 자로서 중앙의 유교적 봉건체제를 제주에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유교적 봉건체제를 확립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제주 민중의 정신적 기반인 무속임을 간파하여 신당 129개소와 사찰 2곳을 불태우고 심방 400여 명을 귀농시키는 등 무속혁파에 앞장을 섰다. 「건포배은」은 이를 배경으로 한 그림이다. 

▲ 이형상 목사.사진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주의소리
  이형상 목사는 『남환박물』에서 제주 사람들이 자신의 선정에 감동을 받아 자발적으로 신당을 파괴했다고 기록했다. 정말 그랬을까. 제주설화인 본풀이를 보면 이형상을 깡패로 묘사하며 저주를 퍼붓고 있다. 제주 사람들은 감동은커녕 자신들의 정체성 훼손으로 여기고 분노했던 것이다. 다만 일부 유생 및 관리들이 민중의 분노를 뒤로 한 채 앞장서서 신당을 파괴했다. 권력의 시퍼런 서슬 앞에 알아서 긴 것이다.

  「건포배은」을 보고 있노라면 씁쓸한 마음이 든다. 중앙정부에 의해 휘둘렸던 제주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제주는 역사적으로 항상 중앙정부의 서자였다. 제주의 운명을 결정짓는 정책은 제주도민과 상관없이 언제나 중앙정부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때마다 제주는 갈기갈기 찢김을 당하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신당파괴에 앞장섰던 유생과 관리들처럼 권력에 기생하는 자들이 있었다.

  지난 17일 제주도의회는 제주해군기지 관련 동의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땅바닥까지 떨어진 중앙정부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선 것이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다. 제주의 평화와 생태가 심각하게 훼손되더라도, 강정마을 주민들의 가슴에 못질을 하더라도 중앙정부의 신뢰만 얻으면 된다는 것인가. 조선시대도 아닌데 왜 그러는가. 「건포배은」의 DNA가 체화되어 있어서 그런 탓인가.

  지금 충청도에서는 국가시책인 세종시 원안 수정에 대한 반대여론이 들끓고 있다. 충남지사는 항의표시로 사퇴까지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중앙정부의 충청도에 대한 신뢰가 떨어졌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중앙정부는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 충청도민의 성난 민심을 달래느라 여념이 없다. 그런데 왜 제주에서는 중앙정부의 신뢰 운운하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결국은 민의의 전당인 도의회가 날치기를 감행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가. 제주는 충청도와 달리 도세가 전국의 1%에 불과하기 때문인가.

  도의회의 날치기 이후 깊은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도세가 약한 제주는 태생적으로 「건포배은」의 역사를 반복할 수밖에 없는 팔자인가. 이러쿵저러쿵 할 것 없이 중앙정부가 내리꽂는 정책에 그냥 제주의 운명을 맡기고 가는 것이 불가피한 방안인가.

▲ 신용인 변호사 ⓒ제주의소리
  절망 속에서 체념하며 그렇게 지내다가 문득 현기영의 자전적 소설인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나오는 “민중 속에서 장두가 태어나고 장두를 앞세워 관권의 불의에 저항하던 섬 공동체의 오랜 전통”이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제주의 역사에는 「건포배은」 말고도 장두가 있었다. 민란이 끝나면 목을 내놓는 것이 장두의 운명이었다. 아무도 감히 나설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제주는 이재수를 비롯하여 훌륭한 장두들을 여럿 배출하였다. 비록 지금은 제주 땅에서 21세기 판 건포배은이 펼쳐졌지만 장두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언젠가는 중앙정부의 휘둘림 없이 제주 사람들의 손으로 제주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날이 올 것이다. 그 때는 지금처럼 무늬만 특별자치도가 아닌 명실상부한 특별자치도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장두의 전통이 있기에 절망의 벼랑 끝에서 그래도 희망을 노래한다.  /신용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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