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의 여군女軍, '예청'
조선시대 제주의 여군女軍, '예청'
  • 김오순 (-)
  • 승인 2010.01.15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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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성 문화유적100] (2)조선시대 여군, '제주예청'의 현주소 - 이도1동제주성터

<제주의소리>가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를 연재한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역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를 시작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제주여정의 현장 제주성터 ⓒ제주발전연구원

조선시대 제주에는 여군(女軍)이 있었다. 제주방언으로 예청(女丁)이라고 한다. 제주도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조선시대 내내 왜구의 침략에 시달렸다. 왜구는 밀물을 타고 들어와 3~4시간 마을을 분탕질하고 농산물과 가축들은 물론 여성을 납치해 갔다. 이에 조선왕조는 왜구에 대한 방어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방어시설은 3읍성(邑城) 9진(鎭) 25봉수(烽燧) 38연대(煙臺)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방어시설을 축조했지만, 왜구를 방어하는 데는 관군만으로 턱없이 모자랐다. 이에 대한 자구책으로 집마다 당번제로 번을 서게 되었으며, 여성들도 왜구를 방어하는 데 나서야 했다.

제주예청을 기록한 최초의 문헌인『남사록(南錄)』(1601년)에는“성을 지키기 위해 민간에서 건강하고 씩씩한 부녀자를 뽑아 화살받이터에 보내 세웠다.”고 하였다. ‘화살받이터’는 적의 공격목표가 되는 과녁인 바, 제주여성들은 방어의 핵심지역에 세워져 외적을 방어했던 것이다.

제주여성들은 1901년에 일어난 신축민란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신축민란은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정에서 생겨난 폐단과 세금 걷는 관리의 수탈에 대항해 일어난 민란이다. 천여명의 제주여성들은 제주성을 지키던 교인敎人들을 내쫓고 성문을 열어줘 민란군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같이 제주읍성은 ‘강인한 생활력’으로 평가받는 제주여성의 또 다른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여성유적이다.
조선시대 ‘예청’이라 일컫는 여군은 오직 제주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존재이다. 이로 볼 때 제주여성들은 외적 침입 등 제주사회가 당면한 사회현안 해결에 적극 나섬으로써, 남성과 더불어 제주공동체 운영의 동반자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제주여성들의 적극적이고 당당한 호국정신은 한국전쟁이 터지자 국군에 지원하여 우리나라 여군의 초석이 되었다.

한편 제주성은 1910년 전국에 내려진 읍성철거령으로 헐리기 시작하여, 이젠 그 일부만 남아 있다. 제주여정의 현장 제주성터 제주성은 지금 대부분 도로와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오현단 위 복원된 성터와 구 제주대학교병원 남쪽, 제주기상청 등 그 잔해가 일부 남아 있다. 제주성터는 1971년 8월 제주도기념물 제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 김오순

* 찾아가는 길 - 제주시 남문로터리 동쪽 10m

지식정보 <제주 읍성>

제주읍성은 과거 탐라국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행정의 중심지였다.

제주읍성이 실제로 언제부터 있었는지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고려 삼별초 별장 이문경이 제주성에 도착했을 때 성주 고인단이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는 기록이나, 조선 태종 때‘제주성을 수리했다’는 기록 등으로 미뤄, 고려시대에 이미 제주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초기 제주읍성은 지금의 복개된 병문천과 산지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그 안쪽에 성벽을 쌓아 만들어졌다. 그러다 1555년(명종 10) 1천여 명의 왜구가 침략했던 을묘왜변을 계기로 확장되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제주읍성에 식수 확보가 절실해서였다.

당시 제주읍성내 식수는 가락천이 고작이었다. 이에 1565년(명종 20)에 부임한 곽흘 제주목사는 산지천 동쪽으로 성을 확장하여 동쪽 높은 언덕을 성안으로 끌어들였다. 곽흘 목사 당시 제주성은 성둘레가 5,489척, 높이가 11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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