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3)여성선각자의 산실 - 삼도2동 신성여학원터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역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한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현재의 향사당 ⓒ제주발전연구원

관덕정 맞은 편 길을 건너가면 향사당이 있다. 이 건물은 제주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향사당은 봄과 가을에 온 고을 사람들이 모여 예악덕행(禮樂德行)을 세우는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던 곳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활쏘기는 단순한 무예가 아니라 정신집중의 한 방편이었다. 젊은이들의 술 마시는 법도 또한 어른의 지도를 받으며 절도 있게 익히도록 했다. 그렇게 향사당은 남성들의 교양을 위한 전용공간이었다.

제주여성이 향사당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이곳이야말로 제주여성교육의 시발점이요, 걸출한 여성선각자들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신성여학교가 들어선 것은 1909년이었다. 제주도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가 프랑스인
신부 구마르첼리노(具瑪瑟)에 의해 문을 열었다. 교육과정을 예비과(유치부), 본과, 보수과 이렇게 3단계로 두고 5세부터 15세까지의 어린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였다.

초기의 입학생 중에는 이재수란 때 부모를 잃은 천주교도의 자녀들도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로 강평국(姜平國)을 들 수 있다. 강평국은 이 학교에서 발군의 실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하며 1회로 졸업하였다. 서울의 경기여고로 진학하여 그 명석함을 떨쳤으며 이름을 평국(平國)이라 고치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었다. 최정숙(崔貞淑)과 고수선(高守善)도 이 학교에서 꿈 많은 소녀시대를 보냈고 모두 서울로 진학하였다.

제주의 근대를 이끈 여걸 3인방을 배출한 신성여학교의 존재는 제주여성사에 깊이 각인될 것이다. 1916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서 문을 닫을 때까지 신성여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은 150여 명이 된다. 이 학교 졸업생 중에는 비록 서울로 진학은 못했을지라도 제주사회와 가정에서 여성교육의 성과와 중요성을 전파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향사당 건물은 조선시대에는 선비의 예절과 교양을 학습 향사당에 있었던 신성여학원. 생도들이 창립자 구마슬 신부를 송별하고 있다(1915년). /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관

*찾아가는 길 : 관덕정 맞은편→라곤다호텔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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