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5)기자신앙의 성지 - 건입동 동자복·용담동 서자복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한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건입동의 동자복 ⓒ김순이

제주특별자치도는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과 서자복을 하나로 묶어 복신미륵이라는 명칭으로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하고 있다. 이 두 석불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탐라시대 제주성의 동쪽과 서쪽에 우뚝 서서 오고가는 선박과 뱃사람들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자복이 있는 자리에는 만수사(萬壽寺), 서자복이 있던 자리에는 해륜사(海輪寺)라는 큰 절이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융성하였고 특히 미륵신앙이 서민들에게 널리 퍼져 있었다.

제주성 동서 양쪽 언덕에 세워 두고 신앙하였던 이 두 석불이 미륵불이라 불렸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미륵은 석가세존이 입멸하고 난 후 56억 7천만 년 후에 이 세상에 나타나서 용화수 밑에서 성도한 다음 모든 중생을 건진다는 보살이다. 미륵신앙이 얼마나 널리 펴졌는지는 우리나라 여기저기에서 미륵불이라는 이름의 불상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국보 제78호·국보 제83호로 지정된 미륵반가사유상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불상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동자복과 서자복은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여성들의 신앙대상으로 변하게 되었다. 아들을 낳지 못하면 집안의 대를 잇지 못했다 하여 여성을 내쫓는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여성들에겐 수치요 공포였다. 이 석불이 기자신앙의 대상으로 유명해진 데는 그 영험함이 여성들의 입을 통하여 널리 퍼졌기 때문일 것이다. 서자복 오른쪽에는 화강암으로 남근을 만들어 두고 있다. 그 위에 치마를 걷고 걸터앉아서 빌면 효과가 있다는 이야기가 딸려 있어 이 석불은 더 유명해졌다.

▲ 용담동의 서자복 ⓒ김순이

동자복과 서자복에 대한 명칭은 다양하다. 자복미륵, 자복, 자복신 미륵불 큰어른, 돌미륵, 등돌미륵, 복신미륵 등이다. 형태는 제주의 검은색 현무암으로 조각된 입상으로 전체 길이가 286cm이다. 커다란 귀, 높은 코, 지긋이 다문 입, 아래를 내려다보는 듯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 머리에는 차양이 둘린 모자를 썼으며 의복은 예복을 걸쳤고 두 손은 가슴에 정중하게 모아져 있다.

이 석불의 역사적 의미나 예술적 가치에 대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 석불의 존재 이유는 여성들이 가장 많이 부여하였다.

2009년, 건입동에 있는 동자복은 그 면모를 일신했다. 개인주택 뒤에 있어 기도하러 다니는 여성들, 문화재 답사꾼들이 드나들기가 불편했는데 주택이 철거된 것이다. 그리하여 훨씬 자유롭게 만날 수 있다. 지금은 아들을 낳게 해 달라고 빌고 매달리는 여성이 없을 것 같은 시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이곳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여성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관습의 벽을 깨는 데에는 오랜 시간보다는 용기가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 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담당관 

*찾아가는 길(서자복) - 용담동 용연→용화사 경내
  찾아가는 길(동자복) - 건입동사무소→바다 쪽 50m 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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