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방 사람들도 찾아와 고개 숙이는 김만덕 묘비
타지방 사람들도 찾아와 고개 숙이는 김만덕 묘비
  • 김순이 (-)
  • 승인 2010.02.1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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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성 문화유적100] (7) 건입동 의녀반수 김만덕의묘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김만덕 묘비(왼쪽)와 묘탑(오른쪽) ⓒ김순이

김만덕(1739~1812)은 현재 제주역사의 대표적인 여성을 넘어 한국적인 여성이 되었다. 아마 머지않아 세계적인 여성의 반열에 오를 것이다. 그런 평가를 받고 있는 까닭은 무얼까. 그 핵심은 자선(慈善)에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불우한 사람들에게 흔쾌히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의 높은 경지, 만덕은 그 정상에 도달했던 여성이다.

세상에 돈이나 재물을 모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그러나 그 재물은 자신을 위한 것이고, 자식과 후손을 위한 것일 뿐,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지는 못한다. 더구나 재산을 모으는 과정에서 갖은 멸시와 고난을 당했다면 더 애착이 가게 마련이다. 그게 상식이다. 그런데 만덕은 그 상식을 깨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만덕은 만고에 멋진 여성이 되었다.

1795년(정조 19) 갑인년 흉년이라는 최악의 흉년이 연속으로 제주를 강타했을 때, 만덕이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을 내놓아 쌀을 사다가 구휼한 일은 조정을 감동시켰다. 더구나 이름난 만석꾼이나 천석꾼이 아니라 기생 출신 여성이라는 데 놀라움은 더 컸다. 만덕은 기녀 출신이었으나 자신의 처지에 주저앉거나 원망하며 한스럽게 눈물이나 뿌리며 신세타령하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차근차근 자신을 그 상황으로부터 탈출시킨 지혜로운 여성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자신을 최고의 경지로 끊임없이 끌어올린 현명한 여성이었다.

김만덕의 무덤은 사라봉 모충사 경내에 있다. 고으니모루(건입동 710번지)에 있었던 원묘가 도로확장에 들자 유해를 수습하여 유골은 현재의 묘탑에 안치하였다. 원묘에 있었던 묘비와 상석, 동자석, 망주석 등은 모충사의 만덕관 입구에 놓여 있다. 2008년, 제주특별자치도는 김만덕의 원묘에 세워져 있던 비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이 비는 만덕이 73세로 사망한 1812년(순조 12)에 세워진 것으로 상태가 좋아 비문 읽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 비문의 내용은 생몰시기, 출신, 성장과정, 재산형성, 진휼과정, 상경, 금강산 유람, 용모, 후
손에 대한 것들이다. 역사적 인물 중에는 생몰연대가 분명치 않아 연구에 지장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 비문은 만덕에 대한 증언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김만덕의 묘를 찾게 되면 짙은 나무그늘에 서 있는 비석과 동자석 등의 석물도 찾아보면 얻는 게 분명 있을 것이다.

서양식으로 만들어진 묘탑은 하얀색으로 둘레에는 김만덕의 일생을 동판으로 부조(浮彫)하였다. 요즘 이곳에 참배객이 늘어나고 있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다. 제주여성만이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찾아와 김만덕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건 제주를 자랑스럽게 한다. / 문화재청 문화재담당관 김순이

* 찾아가는 길 : 국립제주박물관→우당도서관→사라봉 모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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