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8)미륵불의 화신 - 화북동 윤동지영감당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제주의 신당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가운데 돌미륵형태의 신을 모신 당도 있는데 그 곳이 바로 ‘윤동지영감당’이다. 마을사람들은 미륵불의 화신이라 믿고 있다. 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마치 제주의 민가를 찾아가는 입구인 올레를 연상시키는 길고 구부러진 돌담이 둘러져 있다. 그래서 당은 길에서 굽어들어야만 볼 수 있다. 입구에 다다르면 정사각형에 가까운 돌담이 주변을 두르고 있고, 네모난 궤를 만들어 그 안에 신상을 모시고 있다. 신상은 머리와 몸으로 누어 한지로 감싸고 있다. 신상의 오른쪽 앞에는 작은 석상이 하나 있는데 한지를 두르고 마치 미륵 신상을 수호하듯 얌전히 앉아 있다.

▲ 윤동지영감당 ⓒ장혜련
당본풀이를 보면 신상이 이곳에 모셔지게 된 연유와 옷을 히게 된 이유들이 나타나 있다.

윤동지 영감은 옛날 화북 모실에 사는 윤칫 할으방이랐수다.
호로는 이 할으방이 바당이 갈치 낚으레 갔단 백발술에 옹낚시에 석상미럭 돌푼체가 올라오난 모사단 당서립을 하였수다.

윤동지 영감은 옛날 화북마을에 사는 윤댁(尹宅)할아버지였습니다. 하루는 할아버지가 바다에 갈치 낚으러 갔다가 백발줄(한발은 양팔 벌린 길이를 뜻함, 긴 낚시줄)에 옹(翁)낚시에 석상미륵(石像彌勒) 돌부처가 올라오니까 모셔다가 당(堂)설립을 하였습니다.
- 『제주도무가본풀이사전』(진성기, 1991)

이 석상은 경상북도 안동의 절에 있던 부처님인데 제주의 ‘관음사’에 모시려고 가져오다 배가 좌초되는 바람에 바다에 유실되었다가 윤동지 영감의 낚시에 걸린 것이다. 석상이 걸리자 바다에 빠뜨렸음에도 세 번이나 걸려 올려지니 뱃머리에 두었다. 그래서인지 고기가 잘 잡혀 만선하여 돌아왔다. 미륵을 포구에 두자 어부들이 닻줄을 매어 놓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석상미륵 허리춤에 닻줄이 매어지니 윤씨 할아버지는 몸에 부
스럼이 나기 시작하고 병명을 알 수 없어 점을 치니 석상미륵을 방치하여 낮에는 볕이슬 맞고, 밤에는 찬이슬 마신 조화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석상미륵을 모시기 시작했고 윤씨 집안에서 는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이 조상을 위해서 특별히 준비하는 것이 있는데 자손들은 창호지 두 장을 가지고 가서 한 장으로는 송낙(고깔모자)을 만들어 씌우고, 또 한 장으로는 허리에 두르게 한다. 이 신상을 모신 후에 윤씨 집안이 일어나고 후손들이 다 성공하게 되니 그 소문이 점차 마을로 퍼져나가 점점 이 당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 마을에서 모시는 신이 되었다.

제주의 당은 ‘절오백 당오백’이라 할 정도로 불교와는 친근한 모습으로 공존하는데 이 윤동지영감당도 불교와 무속이 결합되어 한 집안의 신앙에서 점차 마을의 신앙으로 변모되는 과정을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당 가운데 하나다. / 장혜련

*찾아가는 길 : 화북주공아파트 건너편→삼사석비 좌회전 50m→좌회전 100m 좌측→큰 창고 옆 작은길 1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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