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탐라대 이규배 교수, "과거 범죄를 '누구나' 저질렀던 '통상적인' 행위" 빙산의 일각

일본전문가인 이규배 교수가 '제주의 소리'에 역사교과서 왜곡에 대한 글을 보내 왔습니다. 이규배 교수는 제주일고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일본정치사를 전공, 정치학 석사와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는 탐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주4·3연구소 소장, 제주MBC시사진단의 MC를 맡고 있습니다. 대학에서는 총장 비서실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는 《反日 그 새로운 시작》,《누가 日本의 얼굴을 보았는갬,《현대지역정치론》이 있고, 최근 《日本, 두 얼굴 이야기》를 출판한 바가 있습니다. '제주의 소리'에서는 이 교수에 이어 제주대 김동전 교수의 글도 싣을 것입니다.<제주의 소리>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출판하는 제국서원(帝國書院)은 지난 2001년에 '제주=왜구 근거지'論을 기술해 제주도민들의 공분을 자아내면서 강력한 수정요구를 받은 바 있으나, 이번에도 또 다시 이 같은 기술을 유지한 채 "왜구는 제주도와 北九州의 섬 등을 근거지로 하여 밀무역을 행하기도 하고 해적행위를 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 주도하고 있는 일본 우익의 대표적인 후소샤(扶桑社)판 역사교과서는 기존 교과서의 자학사관에서 피해사관으로 역사기술 방식을 바꾸며, 자민족중심주의적인 역사왜곡기술로 악명이 높다. 그런 역사교과서에조차도 ‘제주=왜구 근거지'론은 얼굴을 내밀고 있지 않은데, 유독 문제가 되고 있는 帝國書院의 역사교과서만은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는 일본이 저지른 역사적인 범죄를 자신들만이 자행한 죄악이 아니고 '누구나'가 저질렀던 '일반적인' 죄악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른바 물타기 역사기술의 일환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말로 공범론(共犯論)에 입각한 동죄사론(同罪史論)이거나 공범사관(共犯史觀)의 획책이다.

일례로, 제국서원(帝國書院) 역사교과서만이 아니라 지금 한일 양국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후소샤(扶桑社) 역사교과서에도 "14세기 후반 왜구 안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거나 "1400년대 이후 재차 왜구의 활동이 극성을 부렸지만, 구성원의 대부분은 중국인이었다"고 기술하면서, 조선인과 중국인을 왜구의 공범으로 끼워넣기 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기술방식은 이미 2001년 당시에도 帝國書院과 후소샤를 비롯한 일부 출판사의 역사교과서에서 ‘왜구에는 중국인 등 외국인도 포함’되어 있다고 기술되어 있던 것으로 밝혀진 바가 있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帝國書院·후소샤 등을 제외한 다른 여타 출판사(日本書籍·大阪書籍·敎育出版·日本文敎出版)의 역사교과서에는 ‘왜구=일본인’이란 관점이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고, 게다가 ‘제주=왜구 근거지'론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帝國書院이나 후소샤는 동아시아의 한중일 삼국이 왜구활동과 관련이 깊은데, 유독 일본만 그 도덕성을 비난받는 것은 가당치 않다는 동죄사론(同罪史論) 혹은 공범사관(共犯史觀)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帝國書院 역사교과서가 ‘제주=왜구 근거지'론에 대한 확정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명명백백한 사실도 아니고, 단지 그럴 개연성이 있다는 ‘학설 상황’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으니, 소설이 아닌 바에야 이것은 역사교과서의 기사가 되기에는 너무나 곤란한 것이다.

대표적인 우익의 후소샤 교과서에조차도 이런 글이 실려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三國志魏志東夷傳)』에 등장하는 고대 일본의 야마타이국(邪馬臺國)에 관해서) 이 책을 쓴 역사가는 일본열도에 오지 않았다.

이보다 약 40년 전에 일본을 방문한 使者가 들은 내용을 역사가가 기록하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사자도 열도의 현관에 해당하는 후쿠오카현(福岡縣)의 어느 지점에 머물러서 야마타이국을 방문한 것도 아니었으며, 일본열도를 여행하지도 않았다. 기사는 반드시 정확하다고 말할 수 없다.”

역사왜곡으로 악명 높은 후소샤 역사교과서조차도 이처럼 증명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기술’을 보류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물론 후소샤 역사교과서는 온갖 역사왜곡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물며 帝國書院 역사교과서는 명명백백히 증명되지도 않은 ‘제주=왜구 근거지’론을 버젓이 ‘역사적 사실’로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동죄사론(同罪史論)·공범사관(共犯史觀)은 여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일례로, 예전의 일본 역사교과서에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1935년에 이디오피아를 침략’했다고 쓰고 있고, 아편전쟁을 전후한 서구열강의 중국간섭에 대해서도 ‘청국에 대한 열국의 침략’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무솔리니나 서구열강은 이디오피아와 중국이라는 명백한 주권국가를 군사적으로 침탈했으니, 이건 당연한 역사기술이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교과서, 특히 후소샤판은 “(아편전쟁을 통해) 영국은 홍콩을 점령하고,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쓰거나, ”(서세동점의 시대에) 구미열강의 진출", 혹은 “(청일전쟁 후) 열강제국은 청나라로 몰려들었고, 곧바로 각각의 조차지를 획득하며 중국 진출의 발판을 쌓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전의 분명했던 ‘침략’이 지금은 ‘진출’로 둔갑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서구열강의 아시아 유린을 ‘침략’이 아닌 ‘진출’로 해석함으로써, 서구열강에 뒤이어 자행되었던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을 ‘진출’로 기술할 수 있는 역사해석상의 근거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일본의 아시아 ‘침략사’를 ‘진출사’로 변조시키고 그 범죄사의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해서 영국이나 미국, 프랑스 등 구미열강을 끌어들이는 물타기식 역사기술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교활한 역사기술 방식을 찾기는 그다지 어렵지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서술한 후소샤판 역사교과서의 다음 기술은 물타기식 동죄사론(同罪史論)·공범사관(共犯史觀)의 전형일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에서 전쟁 중에 비무장한 사람들에 대한 살해나 학대를 전혀 범하지 않았던 나라는 없으며, 일본도 예외가 아니다. 일본군도 전쟁 중에 進攻한 지역에서 포로가 된 적국의 병사나 민간인에 대해서 부당한 살해나 학대를 행했다. 한편 많은 일본의 병사나 민간인도 희생되었다.”

어떤 나라나 전쟁 중에 범한 범죄는 다 똑같다, 다만 일본은 그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며, 게다가 일본도 희생자라는 식이다. 帝國書院의 '제주=왜구 근거지'론은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일 따름,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는 자신들의 과거 범죄사를 '누구나'가 저질렀던 '통상적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른바 동죄사론(同罪史論)·공범사관(共犯史觀)의 거대한 전주곡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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