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동전 교수 : 일본역사교과서의 왜구인식론을 비판한다.

 

▲ 김동전 교수
황국사관 및 군국주의의 부활

  올바른 미래사회의 창출이라는 점에서 역사학은 미래학이다. 따라서 잘못된 역사교육은 반드시 불행한 미래를 초래한다. 우리가 일본의 한국사 왜곡을 주목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독도 영유권 침해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가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일본역사교과서에 나타난 일본 정부의 비역사적이고 반역사적인 인식이 우리를 더욱 분노케 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청소년들에게 황국신민을 강요함으로써 100년 전의 황국사관 및 군국주의의 부활을 시도하고 있다. 그들은 21세기 동아시아의 번영과 공존을 위한 파트너가 아니라, 주변국과의 역사전쟁을 야기함으로써 동아시아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이는 유네스코에서 권고하는 국제이해와 인류평화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기술해야 한다는 방침에도 전면 위배되는 것이다.

왜구에 대한 역사왜곡 실상

  특히 일본역사교과서 가운데 후소샤와 데이코쿠쇼인(帝國書院)판에는 2001년에 이어 제주도를 마치 왜구의 소굴이었던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제주도민들의 거센 반발과 비난을 사고 있다. 교과서에 기술된 왜구 관계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보자.

① 후소샤판(2005) : 왜구란 이 당시 조선반도 및 중국 대륙 연안에 출몰했던 해적집단을 뜻한다. 그들 중에는 일본인 외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p79)

② 데이코쿠쇼인판(2005) : 왜구는 제주도와 북구주의 섬 등을 근거지로 하여 밀무역을 행하기도 하고 해적행위를 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이즈음의 왜구는 일본인 중심으로 그 밖에 조선인과 중국인 등도 가담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p68)

  후소샤판에서는 왜구 중에 ‘조선인도 많이 포함되고 있었다’고 기술함으로써 왜구의 핵심인 일본인에 대한 실체를 흐리게 하고 있다. 또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문적인 전투 집단인 왜구를 마치 단순한 해적집단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데이코쿠서원판에서는 제주도를 첫머리에 기술함으로써 제주도가 마치 왜구의 소굴이었던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즉, 왜구의 근거지였던 일본 내의 대마도(對馬島), 일기도(壹岐島), 송포(松浦) 등을 감추고 전혀 근거가 없는 제주도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왜구가 밀무역을 하는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해적행위를 하였다는 암시를 내비치고 있다.


이는 왜구의 불법적 약탈행위를 정당한 경제행위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미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밖에 후소샤판과 마찬가지로 왜구 중에는 조선인도 가담하고 있었다고 함으로써 전후문장을 연결해서 보면 왜구의 최대 근거지가 제주이고, 여기서 말하는 조선인을 마치 제주인과 연결되도록 교묘한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결국 일본역사교과서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제주=왜구의 거젼. ‘왜구=제주출신’이라는 허무맹랑한 논리로 역사적 사실을 날조하고 있다. 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행위이다. 국내(고려사, 고려사절요, 조선왕조실록 등)나 중국, 일본 문헌 그 어디에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역사적 근거는 단 한 줄도 없다.

  다나까, 다카하시의 허무맹랑한 왜구 연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역사교과서는 왜구에 대한 역사왜곡의 핵심에 있는 다나까 다케오(田中健夫)와 다카하시 기미야키(高橋公明)가 주장하는 ‘왜구 = 고려, 조선인 주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듯 싶다. 이 두 학자의 연구는 비판의 가치가 없을 정도로 매우 편파적이며, 자의적인 사료의 해석과 추론으로 일관하고 있어 객관성을 결여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나까 다케오는 ‘왜구활동과 제주도의 관계를 직접 증명하는 자료는 없지만, 왜구의 존재는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제주도인이 왜인의 언어나 의복을 모방한다는 것은 왜인과 사이에 일체감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으로 앞으로 검토할 문제이다. 대마도는 제주도와 함께 왜구활동의 중요한 근거지였다고 말할 수가 있을 것 같다.’(왜구와 동아시아 통교권, 1987)라 하여 앞뒤가 전혀 안 맞는 결론을 도출하고 있다.

    다카하시 기미야키는 더욱 가관이다. 이성계가 황산전투에서 왜구의 청년대장인 아지발도를 물리친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데, 다카하시는 ‘아지발도가 섬 출신이며, 당시 왜구들이 말 1,600필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지발도는 말이 많이 생산되는 섬인 제주도 출신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하게 된다.’(중세동아시아해역에서의 해민과 교류:제주도를 중심으로, 1987) 지면 관계상 일일이 그들의 논리를 비판할 수 없지만, 이들이 주장하는 근거가 매우 비과학적이며 비객관적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왜구의 제주 침입, 방화 약탈 인명살상 자행

  제주도가 왜구의 소굴이 아니었다는 점은 다음 몇 가지 점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첫째, 고려 말 이후 제주도에 대한 왜구의 침입이 수 십 차례 나타나는데, 제주가 왜구의 거점 지역이었다면 왜구들이 제주를 침범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제주는 왜구들의 약탈지인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왜구들이 땔감과 물․식량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유리한 지역이었다.

이에 왜구들은 그들의 활동 중간 기착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제주에 빈번한 침입을 가해왔고, 방화․약탈․인명살상을 일삼았다. 더구나 왜구들은 추자도 근해에 숨어 있다가 제주의 공물운반 선박을 약탈하거나 추자도와 남해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일종의 수적(水賊)을 납치하여 그들의 노예로 삼는 일도 간혹 발생하였다. 수적은 왜구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른 오갈 곳이 없는 바다의 좀도둑이었다.

  왜구의 해상권 장악 좌절

  특히 천미포왜란과 을묘왜변은 왜구들이 해상권 장악을 위해 얼마나 제주를 그들의 거점지역으로 삼으려 했는지를 잘 입증해 준다. 천미포 왜란은 명종 7년(1552) 5월에 왜구가 정의현 천미포에 침입해서 주민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한 일련의 사건을 말한다. 을묘왜변은 명종 10년(1555) 1천여 명의 왜구가 60여 척의 선박에 분승하여 화북포에 상륙, 제주성을 둘러싸고 3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사건이었다. 제주인들은 이를 잘 막아냄으로써 제주도를 해상 거점지로 삼으려는 왜구들의 꿈을 좌절시킬 수 있었다.

  제주도 전주민의 군사화, 지역의 요새화

  둘째, 제주도민들은 계속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방어에 주력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는 남자들만의 몫일 수만도 없었다. 제주도에만 존재했던 여자 군인을 의미하는 여정(女丁)은 왜구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제주도 전주민의 군사화가 왜구를 막아내어 오늘의 제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제주가 왜구의 근거지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셋째, 제주에 남아 있는 곳곳의 방어유적도 제주가 왜구의 거점지역이 아니었음을 입증한다. 각 마을에서 활 쏘는 장소로 이용했던 ‘솔대왓’혹은‘사장밭’, 해안가의 38개 연대, 먼 바닷가를 감시하기 위한 25봉수, 별방진, 명원진 등 9개의 거점 진성, 제주읍성, 정의현성, 대정현성 등 3개의 읍성으로 이루어진 제주의 방어체계는 한마디로 왜구를 막아내기 위한 군사요새였다.

  학문적 대응 논리 개발 필요

  21세기에 새롭게 등장하는 일본역사교과서의 왜구 인식은 한국-중국-일본으로 연결되는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보다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일본 정부의 고도한 술책이 깔려 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보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적 대응 논리를 개발함으로써 근본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할 것이다. 기존의 왜구연구가 주로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인 일본 입장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우리가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그 결과, 왜구를 유럽의 바이킹에 비교하여 동아시아 문물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거나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전 주민이 합세하여 발생한 새로운 운동으로 미화되는 사례도 발생하고 있다. 

  앞으로 전문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제주와 왜구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하고, 철저한 고증과 분석을 통해 왜구의 실체를 보다 객관적으로 밝혀나가야 할 것이다.
                          
                          김동전(제주도사연구회장, 제주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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