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고유기 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 도민여론에만 미룰 것인가

 화순항 해군기지문제가 3년만에 공식 재추진되고 있다. 해군측은 "주민들이 반대하면 강행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지만, 3년전 이미 해군은 "주민이 반대해도 추진해야 될 사안"이라는 입장 또한 밝힌 적이 있다. 이는 지역주민, 제주도 지자체, 도내각계인사 등 도민 누구나 할 것 없이 반대했던 사안을 끝끝내 재추진 하는 현재의 상황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홍보자료를 통해서 해군이 밝히고 있는 화순항 해군기지의 내용은, 3년전보다 규모면에서도 확대된 면모를 보이고 있지만, 군 내부적으로 많은 진척을 거듭해 온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2002년에는 극구 부인하던 이지스함의 정박이나, 미항모 입항가능성도 아예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을 보면 기지건설에 대한 자신감마저 엿보인다.

'평화의 섬' 정책 관련자들, 뭐하고 있나?

하지만 화순항해군기지 문제가 재차 뜨겁게 부상될 것이 예고되고 있음에도, 제주도정이나 특히 평화의 섬을 주창하고 입안했던 도내 지식인 그룹은 잠잠하다. 도지사, 남제주군수 등 단체장들도 특유의 주민공감대가 필요한 사안이라는 명분으로 한 발 물러서 피해 있을 뿐이다. 물론, 어떤 사안이든 도민여론과 공감대가 무엇보다도 중요할 수 있다. 제주도의 명운과 관련된 군사기지문제는 더더욱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책임방기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올해는 바로 제주도가 국가로부터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원년이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지정됐다고 앞다투어 의미부여하고, 자축연을 벌이고 하던 때가 불과 두 달 전인데, 어떤 형태로든 평화의 섬 정책과 중대한 영향관계를 가지는 해군기지 문제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도민들이 결정할 사안'으로 미뤄두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여기서 화순항 해군기지 반대를 위한 주장을 펼 생각은 없다. 다만, 해군기지 문제가 재등장한지 벌써 한 달이 다 돼 가는데도 입장은 고사하고 이렇다 할 해결고리 하나 내놓지 못하는 도 당국과 평화의 섬 정책관련자들에 대해 답답함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해군기지가 평화의 섬 정책과 상충되니 이를 철회하라는 논리와 해군측에서 주장하듯 오히려 평화의 섬을 위해 해군기지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첨예하게 부딪힐 거라는 상황이 충분히 예견되고 있는데도, 정작 제주도 당국을 비롯한 평화의 섬 정책관련자들은 이리 저리 동향만 살피는 형국이다.

'평화의 섬' 정책의 새로운 변수, 해군기지

해군이 재추진의사를 밝힌 화순항 해군기지는 해군의 오랜 숙원인 '대양해군'론과 더불어 이른바 '협력적 자주국방'론을 배경으로 추진된다고 보여진다. 물론, 이는 2002년 화순항 해군기지론이 처음 등장한 이후인 2004년에 갑작스레 출연한 개념이지만, '협력적 자주국방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한·미군사동맹체제의 변화에서 비롯된 개념이라는 점에서 이는 화순항기지건설의 중요한 논리적 배후가 되고 있는 듯 하다.

즉, 결정적으로는 9·11테러 이후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에 따라 주한미군 감축 및 재배치문제가 검토되면서 본토방위의 임무는 한국군이 주되게 수행하고, 미군은 동아시아 지역방위 임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는 미국의 신군사전략의 하위범주에서 태동되었다는 것이 관련전문가들의 지배적인 해석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한국군의 전력증강론으로 귀결되었고, 해군은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도 화순항 해군기지는 이러한 한·미군사동맹 체제변화의 산물이라는 범주를 벗어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본질적 메커니즘을 배경으로 하는 해군기지의 문제가 어떠한 식으로든 국가차원에 의한 세계평화의 섬 정책과 직접영향구조에 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해당 지역주민의 의사여부에 맡겨지고 있는 지금의 현상은 참으로 안타까움 이상의 심각한 '현상호도'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제주도가 만든 '평화의 섬'홈페이지에는 이 정책이 추구하는 평화의 개념이 잘 드러나 있다. 국가가 지정한 '평화의 섬, 제주'의 가치지향은 바로 '적극적 평화'로서의 평화론이다. 즉 해당 홈페이지에 적시하고 있듯, 제주도가 원하는 평화의 상은 "전쟁이 없는 상태의 소극적 평화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 욕구가 충족되고 정의가 존재하는 상태의 적극적 평화를 실천해나가는 일련의 사고체계와 정책등을 포괄하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활동체계"이다.

이러한 적극적 평화론은 '제주를 동아시아외교중심지로 육성', '제주국제평화센터 등 국제평화기구 설립 및 유치', '주변국과의 협력체제 강화' 등의 과제로 구체화 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제들은 제주도적 진로를 뛰어넘는 국가차원의 과제가 동시에 수렴된 내용이라 할 것이다.

특히, 이런 내용에 미뤄볼 때 오늘 날 주변국 정세와 관련 가교적 역할론이 강조되는 최근의 '동북아균형자론' 등 동북아체제담론과 관련해 '평화의 섬' 구상이 단지 제주도 내부의 이상론만은 아니라는 현실감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남북분단의 끝, 동북아의 중심점에 놓인 제주도의 지정학적 요건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한편으로, 제주도의 시각에서 '평화의 섬'으로서 진로를 선택한 순간, '위험성'과 '가능성'이 동시에 상존하는 공간으로서 제주도가 이제 국제협력무대로서의 가능성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이정표를 획득했다는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제주도가 국가에 의해 마침내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되는 과정에서, 제주도 평화의 섬은 도대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다. 그 중 2000년 제주발전연구원이 내놓은 '제주평화의 섬 모형정립과 실천방안'이라는 결과물은, 현재의 평화의 섬 정책의 내용적 배경으로 한 몫하고 있다.

이 연구결과는 제주도 평화의 섬의 전제로서 '중립화'와 '비무장화'를 제시하고 있다. 좀 더 자세히는 "동북아 국가간의 이념 및 군사적 대립구조의 역학관계 속에서 제주가 군사적 대립과 전쟁 개입 가능성을 예방하고 한반도 내지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제주는 최소한 '중립화' 또는 '비무장화'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적어도 이러한 관점에서 작금의 해군기지론은 제주도 평화의 섬 지향에 대한 상충된 결과로서 작용할 것이다.

결국, 제주도가 세계평화의 섬으로 지정된 원년으로서 지금, 그 정책의 내용과 지난 시기 논의의 전체적인 맥락까지도 포함해 최근 재차 부상한 해군기지문제는 상당한 변수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를 '주민 의사'에만 맡기자는 식의 태도는 그 결과여부에 상관 없이 '책임과 의지의 실종'이라는 상당한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해군기지는 제주도 발전정책에도 큰 변수가 된다.

제주평화의 섬 지정이 의미를 갖는 것은 동북아평화체제 기여라는 국가적 시각 말고도 제주도적 입장에서 제주도의 미래를 담보할 발전(번영)정책의 중요한 축이 되기 때문일 것이다. 평화의 섬 지정의 법률적 근거가 제주국제자유도시특별법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설명되고 있다.

즉, 정책 입안자들에 깔린 평화의 섬 구상에는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현재적 계승이라는 근본이념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지난시기 한·미, 한·소, 한·일 정상회담 유치 등의 업적이 평화의 섬으로 갈 경우 국가적으로 보장된 형태의 국제교류의 장으로 인정되면서 더욱 확대돼 제주발전의 큰 메리트로 작용한다는 현실인식이 중요한 배경이 되고 있는 것이다.

평화포럼을 정례화 해 다보스 포럼에 버금가는 규모로 키우겠다는 지향도 이를 반영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앞서의 제주발전연구원의 연구결과물에서 제시하는 평화의 섬 컨셉에도 이는 중요한 한 축이 되고 있다. 제주평화의 섬이 '평화·번영·복지의 섬'을 내용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도는 지정학적으로 환황해경제권과 환동해경제권을 연결하고, 동북아경제권과 동남아경제권, 나아가 아시아·태평양경제권간의 연계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최적의 위치에 있다. 따라서 제주가 이러한 경제적 협력체체의 활성화를 위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법·제도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도 '제주평화의 섬'선포와 관련하여 추진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더구나 최근 국제자유도시정책이 표류하고 있는 실정을 감안할 때 제주평화의 섬 정책이야말로 제주의 미래번영과 관련된 최상의 종합적 발전전략일 수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도 단지, 인구유입이나 역내 부분경제의 메리트를 이유로 (그것조차 불투명하지만) 해군기지문제를 판단유보로 놔두고 주민여론에 주되게 의존하려는 도 당국의 모습과 애써 따낸(?) 평화의 섬 지정에 참여했던 입안자들의 실종(?) 현상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도와 평화의 섬 정책관련자들은 시급히 작금의 해군기지 건설론의 문제를 보다 주도면밀하게 판단하려는 노력에 나서야 할 것이다.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사무처장]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