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길현 칼럼] 한쪽은 '건국포장' 훈장...다른쪽은 '벌금형'

  4.19는 혁명인가, 의거인가, 민주항쟁인가? 1960년 4.19 이후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4.19에 이름붙이기가 쉽지 않다. 이는 4.19를 둘러싼 논쟁과 시각 차이가 학자들 간에도 존재하기 때문인데, 어쩌면 그러한 복합성이 더 실상에 가까운 게 아닐까. 복잡다단한 현실 세상의 역동적 사건을 한 마디로 규정하는 게 오히려 더 무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만 여기서 잠시 왜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한 시점인 4.26이 아니고 4.19일까를 잠시 생각해 보자. 그것은 아마도 ‘피의 화요일’이라 칭해지는 1960년 4월 19일 서울에서만 20만 명이 참여한 시위에서 민간인 111명이 사망한 참혹함을 기리기 위함일 것이다. 4.19 이전인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고등학생들에 의해 최초로 반정부시위가 촉발된 이후 3월 15일에는 마산에서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시위로 인해 최소 10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4월 18일에는 연좌데모를 하던 고려대 학생들이 반공청년단 등으로부터 피습을 받았다. 이렇게 2.28부터 4.19까지 반정부 시위의 촉발은 학생들로부터 주어졌기에, 혹자는 이를 두고 4.19학생민주혁명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4.19 50주년을 맞이하면서 4.19에 대한 학술 발표는 1960년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이 하야를 천명하기까지 미국이 얼마나 그리고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였는지에 주목을 하고 있다. 특히 당시 맥카나기 주한미대사가 이승만대통령에게 압력을 가하고 또 한국의 군부에게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종용하는 등의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이른바 이승만정부의 퇴진이라는 성과로 이어졌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도 4.19가 대표적인 제3세계 민주화운동의 하나로 자리 잡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4.19의 극적인 대단원을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파악할 경우, 4월 19일보다는 4월 26일에 더 주목하는 건 자연스런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4.26이 아니라 4.19로 이름붙이는 데에도 혹 어떤 눈에 보이지 않은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든다. 왜냐하면 4.26에는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1960년 2월 28일부터 4월 26일까지의 4.19 전개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한 추동력으로 ‘4.25 교수시국선언’이 자주 그리고 조금은 과장되게 거론되어 왔다. 그 이유는 1960년 4월 25일 27개 대학에서 258명의 교수들이 처음으로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를 공식 촉구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였고, 이어 다음 날 이승만대통령의 하야 성명이 발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대통령이 교수 시국선언을 보면서 하야를 결정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고, 다만 미대사가 이승만대통령에게 압박을 가하는 수단으로 교수시국선언을 활용할 수는 있을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미 대사관이 먼저 교수들에게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는 설도 제시되고 있는 만큼, 이승만대통령의 하야에는 미국의 압력이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동인인 것으로 보아 무방해 보인다.

  2010년 4월 16일 국가보훈처는 4.19 50주년을 맞아 주도적 역할을 한 공로자 272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한다고 밝혔는데, 여기에는 4.25 교수시국선언에 참여한 정석해(연세대), 이희승(서울대) 등 41명의 교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50년이 지나서뒤늦게라도 이들 명단을 발굴한 보훈처의 노고를 치하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이들 교수 41명이 정말 건국포장을 받을 만한 가에 대해서는 조금 의구심이 든다. 왜냐하면 이들 교수들이 미대사관의 요청을 받고 한 것이라면 더욱 그렇고, 또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4.19가 막바지에 다다른 4월 25일에 이르러 시국선언에 참여한 것이 그렇게 큰 상을 받을 만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회의가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쉽게 생각하기로 하자. 본시 상이란 게 명분만 있으면 자주 그리고 많이 주는 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든 1960년 당시 누구의 종용을 받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교수가 시국선언에 참여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용기와 양심 있는 행동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후대의 당연한 도리 중의 하나일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앞으로도 보훈처가 계속 명단을 발굴해서 이들에게 고마워하는 후대의 마음을 늦게라도 전하도록 하는 데 애 써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2010년 4월 16일 제주지법은 시국선언을 주도한 전교조 김상진 지부장에게 벌금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하였다. 한편에서는 50년 전에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를 공식적으로 요구하는 시국선언 참여교수들에게 ‘건국포장’의 상을 수여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공무원의 집단행동 금지'와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이른바 ‘교육공무원’인 교사에게 벌금형을 선고하고 있다. 물론 이 양자 사이에는, 한쪽은 정부가 하는 것이고 50년 전의 이승만정부에 대한 시국선언이며 또 그 참여자들이 교수인데 반해, 다른 한쪽은 법원이 하는 것이고 현금의 이명박정부에 대한 시국선언이며 또 교사들이 참여한 것이라는 차이가 존재한다. 

  1960년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이 하야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시국선언 참여 교수들은 정부로부터 해직이나 구속 등의 불이익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시국선언은 한편으로는 국민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의사 표현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기본권 행사인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집단행동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4.26 교수시국선언이 집단행동으로서 정치적 파장을 가져왔다고 보기에,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참여 교수들에게 상을 주는 것일 게다. 이렇게 보면 시국선언이 정치활동의 하나라고 본다고 크게 잘 못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시국선언의 대상이 되는 정부는 특히 그 정부가 자신이 없고 비민주적인 성향을 띨수록 시국선언 참여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움직임을 보이기가 쉽다.

 이명박 정부가 시국선언 참여교사들에게 해임과 정직 등의 징계를 하는 건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불편하고 부당하다. 하나는, 1960년의 반이승만 시국선언에 대한 찬사와 다르게 2010년에는 이를 중징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2009년 반이명박 교사시국선언이 국가공무원법 66조(집단행위 금지)를 위반하였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법원 판결이 나기 전에 징계를 하는 것은 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이렇게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사들을 중징계하는 등의 정부의 억압성이 이명박정부 출범 이후 자주 눈에 띠었기 때문에, 교사들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 여기저기서 터진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다. 보다 대범한 정국운용은 원래 어려운 것일까. 아니면 이승만정부와 이명박정부의 특수한 한계 때문일까. 

  2010년 4월 16일 제주지법의 판결 이전 교사시국선언에 대한 판결은 무죄가 2건, 유죄가 3건이었다. 지난 1월19일 전주지법은 무죄, 2월4일 인천지법 유죄, 2월11일 대전지법 홍성지원 유죄, 2월24일 대전지법 무죄, 3월9일 청주지법은 유죄를 선고했기 때문이다. 다섯 차례 시국선언에 대한 재판 결과를 지켜보면서, 마냥 재판 결과에 일비일희하기 보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법적으로 ‘교육공무원’으로 지칭되는 교사에게 어느 정도의 정치활동을 허용할 것인지의 논쟁이 그것이다. 전주지법의 무죄판결처럼 그리고 1960년의 교수시국선언에서 보듯이, 교사의 시국선언 정도는 ‘공익에 반하는 것이 아닌 국민으로서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하는 정치적 포용에서 새출발하면 어떤 문제가 있을까.  

  그러나 4월 26일 제주지법은 시국선언에 대해 일단 외견상으로는 유죄로 판시하였다. 여기서 법원의 판결에 왈가불가할 생각은 없고, 또 법관의 양심적 판단을 존중하고자 한다. 다만 제주지법의 판결 내용을 검토해 보면, 이에 대한 제주지법의 고민이 녹아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즉, 제주지법은 "시국선언이 집단행위 및 정치적 중립의무를 위반한 것이지만 폭력성이나 불법성이 없었고, 시국선언을 한 행위에 대한 참작사유가 있어 지부장에게 벌금 100만원, 사무처장과 정책실장은 선고를 유예한다"고 판시했는데, 바로 ‘폭력성과 불법성이 없었다’는 점과 사무처장과 정책실장에 대해서는 ‘선고 유예’ 판결을 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외형에 있어서 시국선언이 ‘교육공무원’의 집단행위 금지 및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현실적 고려로 마지못해 그 대표자격인 전교조 지부장에 대해서 1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하는 법원의 타협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제주지법의 판결에서 보듯이 국가공무원법 규정을 마냥 무시하기가 어려운 것도 현실일 것이다. 그래서 2010년 교사시국선언을 둘러싸고 여섯 차례에 걸친 판결에서 논쟁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교육공무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재점검을 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즉, 행정공무원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교육공무원인 교사의 정치활동 허용 여부 및 그 범위 혹은 수준 등에 대해 사회적 공론화를 거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1960년 4.19가 그 촉발에 있어서 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중요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 이후 50년이 지난 21세기 한국사회에서 중고등학생들에 대한 기성세대의 시각이 얼마나 시대에 뒤떨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차제에 재점검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

  여기서 하나 더 첨언할 것은, 시국선언 교사들에 대한 제주법원의 판결과 별도로 이들에 대한 제주도교육청의 제재가 과연 타당한가의 문제이다. 우선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도 전에 교육청이 시국선언 교사들을 해임 또는 정직하는 것은 월권이다. 선고 유예를 통해 사실상 무죄가 된 교사들은 물론이고 100만원의 벌금형을 받은 김상진 지부장의 경우도 곧 바로 교직에 복귀하도록 조처해야 한다. 왜냐하면 김상진 교사의 최종 판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제주도교육청의 경우 시국선언 참여 교사에 대해 징계를 하게 된 것이 양성언 교육감의 독자적 판단이라기보다는 교과부의 요청에 의한 것임은 누구나 주지하는 바이다. 2009년 6월 교과부는 시도 부교육감 회의를 열고 전교조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중 본부 전임자 10명이 시국선언을 주도했다고 결론을 내리고 이들에게 해임 징계를, 전교조 시도지부장과 시도 지부 전임자 등 78명에 대해서는 정직 처분을 내려줄 것을 각 시도교육청에 요청했던 것으로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교과부의 하위기관인 제주도교육청이 교과부의 입장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저간의 사정도 이해해 주어야 하지 않느냐의 항변도 있을 수 있다.   

▲ 양길현 제주대 교수
  그렇지만 제주도교육청이 전교조 제주지부장을 해임한 것은 지나치게 교과부의 요구에만 순응한 측면이 큰 것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가 어렵다. 시국선언이 무어 그렇게 큰 범죄라고 이를 주도한 교사를 해임까지 하는 것은 많은 도민의 정서에서 볼 때 가혹한 중징계라는 여론이 더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중앙정부의 하위기관으로서 교육청의 위상이나 적응을 고려하는 제주도교육청 입장에서 마냥 가만히 있기가 어려우면 감봉과 같은 경징계로 대처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교육청이 가혹한 징계로 인해 교사들과 그 가족들이 겪게 되는 아픔도 꼭 같이 고려하는 따뜻한 마음을 보일 때, 비로소 제주도의 교육도 더 잘 되어 나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양길현 제주대 윤리교육과 교수  <제주의소리>

<제주의 소리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