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18) 선흘리낙선동4·3성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복원 후 낙선동성의 모습 ⓒ김은희

낙선동 4·3성은 조천읍 선흘리 낙선동에 위치해 있다.

제주4·3사건이 발생하고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 10월부터 제주도에는 해안에서 5km 이상 된 중산간마을 초토화 작전이 실시되었다. 중산간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군인들에 의해 소개되었고, 집들은 불태워졌다. 그런 후에 해안마을이든 중산간마을이든 사람들을 통제하고, 무장대와 주민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마을을 두르는 성담을 쌓게 하였다.

1949년 3월부터 중산간 마을 복구는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원래 마을터에 가서 살게 한 것이 아니라, 경찰이 마을 사람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좋은 곳을 정하면 지역 사람들이 모여들어 성을 쌓으면 입주를 허락했다. 낙선동 4·3성도 선흘리, 와산리 사람들이 들어와 살기 위해서 조천읍 관내 사람들이 같이 쌓은 성이다.

낙선동 성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4·3성 중에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현재 일부 성담과 보초막, 함바집을 예전 모습대로 복원했지만 왠지 씁쓸함이 밀려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낙선동 성안에는 선흘 1리, 2리, 와산리 1,200여명(250호 정도)이 5년 동안 같이 살았다. 파출소가 있었는데 순경은 성안에서 가장 대장이고, 권력자였다. 지서후원회, 특공대, 민보단, 대한청년단 등 조직도 가지가지였다. 이들은 대부분 경찰 보조로 토벌활동을 한다거나, 성담 보초활동을 주로 했다.

거기에 여성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결혼한 기혼여성들은 순경들 부식을 대는 일을 돌아가며 맡았고, 미혼 여성들은 여자한청단에 가입하여 별도의 훈련도 받고, 보초 활동에도 적극 참여해야 했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변 보장을 받지 못한 감시 대상이었다.

낙선동 성에는 총 9개소 보초막이 있는데 그 가운데 여성 보초막이 3곳이었다. 4, 6, 8보초막은 여성 전담 보초막이었다. 그곳에서 매일 밤 5~6명이 대기해 있으면서 2시간씩 교대하며 날이 밝을 때까지 지켜야 했다. 잠시 졸다가 보초막을 순찰 돌던 순경에게 걸리면 단체기합으로 뺨따귀를 맞는등 온갖 모욕을 당했다.

여성 보초근무를 서는 사람들은 함덕국민학교나 조천국민학교에 가서 정식으로 재식훈련과 사격 연습을 받았고, 유니폼도 하얀 저고리에 까만 몸빼 바지를 입었다. 제주4·3사건에 이어 업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전쟁까지 일어나자 제주여성들의 역할은 더 늘어났다.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일은 물론 보초 근무도 강화되어 갔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10대 중반의 어린 남자아이들과 노인들, 젊은 여성들이 성담 보초를 전담하였다. 이들에게 물 문제, 식량문제, 위생문제는 항상 따라 다녔다.

그러나 제주4·3사건 이후 복구에 전력을 다한 결과 1954년까지 대부분 마을들이 복구되었다. 낙선동 성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1954년 초에 원래 마을들을 찾아서 떠났으나 20여 가호는 남아 마을을 형성하여 살았다. 낙선동의 높은 성담은 밭의 경계로, 바람막이의 역할로 이 마을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였다. / 김은희

* 찾아가는 길 : 함덕리 하나로마트→선흘리 방향 3km→낙선동 표지석 맞은편 100m 지점

 [지식정보] 제주4·3사건

제주4·3사건은 1947년 3월 1일 관덕정 일대에 3·1절 28주년 기념식을 하기 위해 모인 3만 인파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순찰을 돌던 기마경찰이 아기를 밟고도 모른 채 가버리는 것을 본 시민들이 격분하여 지서로 몰려 와 돌팔매질을 하는 도중에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경찰의 발포에 대한 사후처리보다는 모든 원인을 남로당의 선동으로 보고 도지사를 교체하고, 응원경찰과 서북청년회원을 대거 제주에 내려 보내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명령한다. 4·3발발 직전까지 제주도민 2500명을 검속하고, 취조 중에 3건의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은 폭발 직전에 이른다.

1948년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국회의원을 뽑는 5·10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단독선거는 있을 수 없다고 여긴 남로당 제주도당은 1948년 4월 3일 2시, 12개 지서와 우익단체의 집들을 습격하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를 ‘레드 아일랜드’로 규정하여 제주도 싹쓸이 작전을 강도 높게 전개한다. 또한 제주도민들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체제를 갖추어 마을마다 성담을 쌓아 그 안에서 생활하게 하였다.

제주4·3사건으로 제주도민 2만 5천~3만명이라는 인명 피해와 제주도 절반 이상이 불에 타는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다. 심지어 소개작전은 고향 마을에서 쫓겨나 걸인처럼 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이는 당시 정부의 무리한 진압작전이 빚어낸 결과이다.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은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들에게 진심으로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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