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권 칼럼]아름다운 도로를 쿠데타 찬양 도구로 삼다니

제주 출신인 게 창피하다?

설 연휴가 길어서 그랬나. 서울로 급히 돌아가지 않고 며칠 더 고향에 머물다간 친구들이 많았다. 덕분에 오래 못 만났던 벗들을 적잖이 만났다. '유붕이 자원방래'하면 즐겁다는 옛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아니었다.

그런데 그 반가움도 잠시, 그놈들이 하는 말이 나를 짜증나게 했다. 요새 같아선 자기가 제주도 출신인 게 영 부끄럽다나 뭐라나. 뭔 말인고 하니 법의 심판을 기다리는 전현직 도지사, 엽기적 비리의 교육감 주변, 뭔가 켕기는 일이 있는 것 같은 제주시장, 출마자 전원이 사법처리 될 위기에 처해있는 교육감 선거, 이쯤이면 제주도가 총체적 부정부패 사회이니 어찌 자기들이 서울 직장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참 별 걱정도 다한다 싶었다. 이게 어디 우리 제주만의 모습이겠나. 게다가 우리 국민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차떼기를 통해 충분히 단련된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나는 '씰데없는(?)' 걱정들 하지말고, 평소에 제주지역의 시민단체에 힘이나 보태주라고 조용히 타일렀다.

하지만 그렇게 그들을 보내고 나니 사실 그들의 창피해함을 이해할 듯도 했다. 왜,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하듯이, 육지에 있는 제주출신들이 느끼는 자괴감은 우리의 그것보다 훨씬 컸을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이름, 5.16도로

어쨌거나 작금의 사태는 단순히 제주사회의 지도층 아니 정확히 말하면 제주사회의 기득권 층 몇몇을 단죄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밑으로부터의 변화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시스템의 변화와 함께 문화의 변화, 정서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뭐 이런 게 바탕이 되어야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화제를 바꾸자. 생활 속의, 밑으로부터의 변화에 초점을 맞춰보자. 굵직하게 터지는 최근의 사태말고, 평소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그러나 밑으로부터의 변화, 일상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주 중요한 사안들도 점검하고 개선하는 노력을 기울여 보자.

서울에 사는 친구들이 부끄러워하는 건, 최근의 사건말고도 또 있다. 이건 제주에 사는 나 역시 외부에서 친구들이 올 때마다 자주 겪는 창피함이다. 뭔고 하니 아름다운 제주도에 어찌하여 독재자의 쿠데타를 기념하는 도로의 이름이 있냐는 힐책이다. 5.16도로 말이다.

현재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5.16을 군사정변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쉽게 말해 군사 쿠데타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쿠데타를 기리는 이름이 제주의 중요한 국도(11번 국도)에 매겨져 있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코미디다. 아니 배꼽 잡는 비극이다. 혈서로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을 써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짐했던 박정희가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로 거론되는 건, 한국 현대사에 대한 무지 때문이다.

물론 독재자에 대한 향수를 가진 사람들은 박정희가 경제발전을 가져다줬다며 5.16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허나 이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우린 일제 식민지배에도 감사해야 한다. 일제시대에 얼마나 많은 근대 시설들이 들어섰던가. 공장, 학교, 병원, 도로, 항만 등 우리 민족이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경제적 성장이 일제의 힘을 통해 달성되지 않았던가.

현재 박정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다. 보수 기득권 층과 그저 법 없이 살만한 순박한 사람들이 그들이다. 후자인 경우는 착하고 착해서 국가권력이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사람들이다.

제주도 환경건설국 건설과장 변창구의 기고를 읽고

사실 5.16도로 명칭 변경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었다. 제주대 철학과 김현돈 교수도 일찍부터 이 문제를 거론했다. 1997년에 그가 쓴 '5.16도로-새 이름표를 달아주자'라는 칼럼은 보기 드문 명문이다. 5.16도로 명칭 변경의 정당성이 설득력 강하게 담겨져 있다. 그의 홈페이지 'www.philoslab.com 사유의 숲'을 방문하여 칼럼 코너를 뒤지면 지금도 다시 볼 수 있다.

김현돈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가 운동의 탄력을 받지 못하다 보니 개인의 주장으로 그치고 말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최근 제주도 환경건설국 건설과장 변창구 씨가 이런 문제와 관련해 도내 일간지에 기고를 했다. 그의 글은 <제주일보 designtimesp=31938> 2004년 2월 4일자 '나의 의견' 코너에 '도로이름 변경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반가운 일이다. 행정당국에서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로 끝맺어진다. 과연 공무원다운 결론이다. 물론 신중해야 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추진할 건 해야한다. 특히 이 문제는 도민의 역사의식과 관계된 일이다. 쿠데타를 합리화하는, 그리하여 외부인으로부터 조롱당하는 그런 역사의식을 바르게 잡는 일이다. 그러기에 이 이름은 정말 '신중'하게 빨리 바꿔야 한다.

도민 여론도 변경을 요구하고 있다. 그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제주도가 제주발전연구원에 의뢰해 조사한 여론결과를 보면 60%가 변경에 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변창구는 반대가 40%라 찬반양론이 팽팽하여 '신중'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가 또 '신중'해야할 근거로 제시한 것이 인터넷 설문조사다. 여기선 변경 반대가 34%라고 한다. 그러면서 정작 찬성은 몇 %인지 밝히진 않았다. 자동적으로 찬성은 66%가 되는 건가. 역시 공무원다운 '신중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인정할 건 인정하자. 언제 이런 문제에 관공서가 먼저 나서던가. 민간의 움직임이 활발해져야 관공서가 따라온다. 그러니 시민사회가 앞장설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선 반대하지 않고 그 '신중'함을 견지하는 것만으로도 관에 대해 고마워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앞서 언급한 김현돈의 글은 그 제목이 '5.16도로-새 이름을 달아주자'이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새 이름을 달자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의 입에서 새 이름이 나오진 않았다. 겸손해서 그랬으리라. 문제 제기만으로 자신의 역할을 한정하고 새 이름은 보다 폭넓은 논의를 거쳐 가장 좋은 이름이 붙여지기를 기대했으리다. 이건 바람직한 자세다.

하지만 그 겸손이 어쩌면 지금까지 이 문제를 방치하게 만든 요인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적극적으로 새 이름은 꺼냈어야만 했다. 때론 겸손이 미덕만은 아닌 경우도 있다. 그러니 이젠 해결하고 넘어가자. 건방 떤다는 비난을 받을지라도 책임감 있게 의견을 내자. 그리고 누군가 낸 의견이 좋다면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확산시키자. 속 좁은 마음으로 괜히 딴지나 걸고 비협조적 태도만 보이는 건 옳지 않다. 그러다간 계속 방치하는 결과만을 가져온다.

김현돈의 글은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다가와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에 맞게 이제 우리가 새 이름을 불러 주자. 그리하여 숲 터널이 있는 그 아름다운 도로가 쿠데타 찬양의 도구가 아니라 제주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꽃'이 되게 하자.

'성판악 도로'라고 부르길 제안한다

무식한 놈이 먼저 용기를 낸다. 그리하여 나는 그 도로를 '성판악 도로'라고 부르길 제안한다. 물론 거창하고 고상한 뜻이 담기면 좋다. 허나 고상함만을 찾다간 자칫 대중과 괴리되기 쉽다. 이름은 일단 편하고 부르기 쉬워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 사물과의 연관성이 충분해야 한다.

'성판악 도로'라는 이름을 제안하는 건 그 때문이다. 우선 부르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반대편 제2횡단도로를 1100도로라고 부른다. 중간 지점에 1100고지가 있기에 붙은 이름이다. 5.16도로 즉 제1횡단도로(11번 국도)의 중간 지점은 성판악 휴게소다. 그러니 1100도로와 대칭으로 '성판악'이라는 이름을 취하는 것은 어색하지 않다.

게다가 성판악은 제주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름이기도 하다. 육지 어디에도 없는 오름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제주시에서 볼 때 어승생 오름이 우뚝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산남의 남원 지경에서 볼 때 어승생 못지 않게 당당한 게 성판악이다.

앞서 언급한 변창구는 관광성도 작명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주장한다. 여기서 관광성이라는 건 아마도 외지에서 온 관광객에게도 익숙한 이름 혹은 제주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름이어야 한다는 말 같다. '성판악'이라는 이름은 이 조건도 충족시킨다. 현재 한라산 정상을 향하는 관광객의 대다수는 성판악 코스를 택한다. 그러기에 그 이름은 이미 익숙하다. 그 코스의 출발점을 지나는 도로, 혹은 그 코스의 출발점에 관광객을 내려 놓아주는 도로라고 앞으로도 쉽게 인지될 것이다.

물론 다른 의견이 있으면 제시하고 활발한 토론이 이어지길 바란다. 허나 내가 경계하는 건 작명은 워낙 중요한 문제이니 '신중'해지자며 사실상 문제를 놓아버리는 자세와 빈정거리기만 하면서 무책임하게 대하는 태도이다. 특히 평소 5.16도로 이름에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제발 논의에 함께 임해주었으면 좋겠다. 언제까지 신중하고 겸손하기만 할 것인가.
이제 더 이상의 신중과 겸손은 쿠데타 수용과 같은 의미로 굳어져버릴 것이다. 다음의 경구를 떠올린다면 분명 그렇다.

"용기를 내어서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 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발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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