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어머님. 나의 어머님. - 강경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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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경팔 (-)
  • 승인 2010.06.21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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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사랑의 사진·편지 공모전 수상작

어머니. 어머님. 나의 어머님. 

자녀를 위해 헌신과 희생을 아끼지 않은 나의 엄마에게 아들을 대표하여 이 편지를 올립니다.

지금부터 40년전 나의 엄마는 마흔에 과부가 되셨습니다.
아버지는 44살 한창 일하실 연세에 후두암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너가 버리셨습니다.

더구나 태어난 지 딱 1개월이 된 막내와 더불어 고 3인 제일 큰 아들 까지 8형제를 남기시고는... 나는 제대로 아버지라고 불러보지도 못한 나이인 초 2학년 때. 엄마는 마지막 희망을 무당들의 힘을 빌려 굿 판을 벌이셨습니다. 아버님의 실낱같은 숨이 끊어진 순간 무당들은 혼비백산해서 달아나버렸습니다.

아버님은 억척 목수였습니다. 그리고 아버님 역시 3살 때 엄마를 여의고 고아처럼 어렵게 사신분이라서 엄마를 23살에 만나서는 자식들에게만은 외로움을 물려주기 싫어서 자녀를 많이 낳으셨습니다.
아들만 7명을 낳고서야 너무하다 싶었는지 8번째는 아이를 지웠는데 산파가 딸이라고 하시는 바람에 딸에 대한 기대로 9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역시 또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는 아들만 8형제를 둔 아들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9식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서 억척스럽게 목수로 사셨습니다. 비바람이 치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도 마다하지 않고 휴일도 없이 일을 하시더니 무리가 되셨는지 덜컥 마흔에 병이 오시고는 그날 이후로 일어서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날 엄마는 한없이 울고 또 울었습니다. 도대체 의지할 곳 없는 이 세상에 남편 하나 오로지 믿고 의지하고 자식 8형제를 키울 욕심으로 살아왔는데 그 모든 것들이 이제 마흔 되신 엄마의 어깨를 누르며 앞날을 생각하니 그야말로 암흑이었을 겁니다.

마흔. 요즘 이 나이면 미시언니라고 불러도 괜찮은 나이지만 엄마는 무려 8형제나 놔두고 떠나버린 아버지를 원망할 겨를 도 없이 숨 가쁘게 남긴 유산과 부채를 짊어지고 모진 겨울 들판에 버려진 가련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누구도 돌볼 이가 없는 가운데 가난한 살림에 8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엄마의 심정은 그야말로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주변에서는 자녀들을 보육시설에 위탁하라고 했지만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기신 한마디“ 여보, 반드시 애들 고등학교까지는 시켜주길 바래요” 는 엄마의 삶의 지표가 되었고 힘이 되어서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희생을 불사하는 부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한(恨)과 학교문턱에도 못 가본 엄마의 한(恨)이 합해져서 절대적인 지상명제가 된 듯이 엄마는 때로 걸인처럼 때로 장터에서 온갖 수모도 마다하지 않으며 자식들을 지켜나갔습니다. 엄마는 날마다 가정경제를 떠맡아 밖으로 행상이나 품앗이 일을 도와가며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야 했기에 우리 8형제들은 입에 풀칠할 수 있는 것만으로 호강이었습니다. 꽁 보리밥에 김치 한 쪽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 있음에 고마워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고등학교 졸업 할 때까지 한번도 개인 식기로 밥을 먹어본 기억이 없는데 1년 내 쌀밥구경은 명절 때나 아님 엄마가 제삿집에 다녀온 경우였습니다. 그런 경우 엄마는  항상 양푼에다 보리밥과 섞은 후 젓가락으로 8등분한 뒤 수저 8개를 꽂아서 자신의 영역만 먹으라고 재촉했습니다. 새 옷은 명절 때 한번, 목욕탕도 명절날, 이발은 엄마가 직접해주시고 나중에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이발을 해주곤 했습니다. 겨울이 되면 우린 한 방에서 커다란 솜이불을 뒤집어쓰고는 얼지 않게 낮에 입었던 옷을 겹 입고는 서로 이불전쟁을 하면서 그런 겨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교에서는 항상 밀린 공납금이나 내야 할 책값, 육성회비로 실랑이를 벌이거나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고는 낙심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우리의 삶이 고아원생활과 진배없어 늘 잘못될 가능성과 유혹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형제들이 나빠질 수 없었던 힘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엄마가 우리에게 착하게 커줄 것이라 기대하고 믿어준 힘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엄마는 자녀들이 나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라 믿어주었고 다른 이들이 힘들지 않냐고 여쭐 때마다 “우리 애들이 착해서 힘이 안 든다.”는 표현을 잊지 않고 해주었습니다. 자라면서 공부에 흥미를 잃고 세상에 염증을 느끼고 불행을 안고 산다는 생각에 껄렁패들과 어울리며 잘난 척 행세를 하고도 싶었지만 그런 엄마의 믿음은 그보다 훨씬 강해서 형제들을 나쁜 길로 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엄마는 평생을 자식들의 먹거리 걱정과 공부에 애를 태우셨습니다.
생계걱정하다 어느날 부터 양봉을 하게 됐는데 이 양봉통 이 무게가 만만치 않는것인데 한창때는 20kg가 넘는 무게라서 꿀 원을 찾아서 이동할 때는 참으로 괴로움이었습니다.

  이삿짐센터에 트럭을 빌려서 꿀 원을 찾아서 깊은 산속으로 이동할 때는 운전수의 투덜거림뿐 아니라 백 개가 넘는 꿀통을 올리거나 내리거나 할 때 가끔 허리가 삐긋해서 몸져 누울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같이 이웃해 있는 꿀집에서 꿀통이 없어진다는 소문에 산중에 천막을 치고 홀로 주무시기도 했었는데 여자의 몸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일들을 엄마는 위대한 사명감을 갖고 수행하는 장군처럼 그런 일 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엄마가 어느날부터 각혈을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는 의료보험이 안 되었기에 병원은 부자나 가는 곳으로 알아서 병원 갈 엄두도 못하고 그냥 민간요법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떤 병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각혈이 1년이 넘도록 없어지지가 않았지만 엄마는 아이들의 밀린 공납금과 쌀값을 위해서 품팔이를 하러 다니셨고 형제들은 걱정을 하면서 잘 때 마음속으로 엄마가 낫기를 기도하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 일본 외할머니 친척으로부터 약을 보내왔는데 그 효과가 있었는지 어느날 부터 각혈이 멈추었습니다.

엄마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있겠나”

  엄마에게 많은 시련이 있었지만 자녀를 잃을 때의 슬픔만큼 부모로서 힘든 시련이 없을 것입니다.

  형제 중에 모든일에 적극적이며 공부를 잘하던 셋째형이 대학가는 것을 포기하고 공군사관학교에 입교를 했습니다. 엄마는 늘 공사복을 입고 휴가를 나오는 셋째아들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 때사 엄마의 긴 겨울이 끝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셋째형은 이제 임관하면 엄마를 덜 힘들게 해드리겠다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빨간 마후라를 달고 임관후 파일럿 훈련 중 전투기 추락으로 형님은 그만 순직을 하고 말았는데 국립묘지에 안장을 하는 날 엄마는 자리를 같이 할 수 없었습니다.

  자랑스러워했던 아들의 죽음을 엄마에게 누구도 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에사 그 사실을 알고는 하염없는 눈물을 거두고는“그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있겠나. 이보다 더 슬픈일을 억울하게 겪는 사람들보다는 낫지 않는가. 나라에 몸을 바쳤으니.” 예의 그 굳건한 사명감을 갖춘 강한 엄마로 돌아오셨습니다.

  이제 엄마가 과부되신지 꼭 40년이 되었습니다.
  올해 8순이 되시는 엄마를 보노라면 아직도 결혼 못하는 막내생각하면서 안타까움에 걱정하십니다. 주름진 얼굴과 손등은 8순노모지만 눈망울만은 예의 젊었을 때의 자식들을 걱정하던 그 눈망울입니다.

  어느덧 내 나이도 아버지의 나이를 넘고 아들 딸을 둔 50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내 부인에게 가끔 엄마이야기를 하면서 만약 당신이 그런 경우에 혼자 남겨졌다면 과연 그 자식들을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물어봅니다. 그러면 웃으면서 자신 없다고 합니다.

  요즘 결혼하면 이혼하고 자녀양육에 관해서 책임을 회피하는 시대에 우리엄마의 희생과 헌신을 알리고 싶습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모든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의 엄마는‘자식들이 있었기에 모든 어려움과 수모를 버틸 수 있었다’고 지금도 말씀을 하십니다.

  8순이 되신 엄마가 우리에게 당부하는 말씀이 오직 한가지입니다.
형제들이 항상 우애를 깊게 하고 이웃에 해를 끼치지말며 다툴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몇 년전부터 형제계를 만들어서 생일 때마다 엄마에게 작은 정성을 마련했습니다.

  올 여름이 엄마의 8순 생신이신데 8도에 있는 7형제와 동서들이 부산에서 2박 3일 일정으로 만날 예정입니다. 그 때는 더 꼬옥 엄마의 주름진 손을 잡아드리고 효도의 말씀을 전해 드리고 싶습니다.
 
  어머님! 당신에게서 받은 것은 너무나 많고, 되돌려 드릴 것은 너무도 적습니다. 앞으로  저희에게 희생한 빚을 형제들이 갚아 나갈 수 있도록 오래도록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의 달 5월을 맞이하여 그동안 간직했던 마음속의 카네이션을 달아드립니다.

 넷째아들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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