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희생자의 위령보다 후세대의 학습에 역점 둬야

최근, 조성중인 4.3평화공원이 4.3 정신을 형상화시키는데 실패하고 방문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접근했다는 지적과 함께 4.3평화공원 조성에 대한 전면 재검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부산교대 최호근 교수께서 "제주4.3평화공원, 무엇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까?"라는 주제의 글을 제주의소리에 보내왔다. 최 교수의 글은 4.3공원 조성 재검토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합리적 핵심을 제기하고 있는 시의적절한 글이라 판단하여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최 교수는 고려대 사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한 후 독일 빌레펠트 대학교에서 막스베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002년부터 지금까지 부산교육대학교 초등교육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최교수는 귀국 후,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는데, 홀로코스트와 제노사이드에 관한 다수의 논문 발표했다). 옥고를 보내주신 최 교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편집자]

제주 도민들의 땀과 국민 전체의 호응에 힘입어 마련될 4·3평화공원. 그 이름과 온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이 공원이 어떤 원칙에 따라 어떻게 조성되어야 할지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여러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일이 필요하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4·3평화공원이 앞으로 세워질 수많은 기념관과 기념공원의 랜드 마크가 되길 기대하며, 독일 유학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학술대회와 기념공원 답사를 통해 얻어진 나의 구상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해 보겠다.

▲ 야드바셈기념관.ⓒ최호근

첫째, 4·3평화공원은 희생자들의 위령보다는 후세대의 학습에 더 역점을 두어야 한다.

죽어야 할 이유도 모른 채 죽임을 당했던 희생자들을 기리고, 그들의 아픔을 나의 것으로 삼는 일은 후세대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희생자에 대한 추도는 평화공원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적은 아니다. 평화공원은 후세대로 하여금 희생자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가해자들의 행동에 전율하며, 죽음의 위기에 몰린 주민들을 구했던 의로운 사람들을 본받도록 만드는 곳이다.

바꿔 말하면, 평화공원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은 희생자, 가해자, 구조자의 입장에 자신을 각각 대입해보는, 삼중(三重)의 동일시 경험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공원 전체를 압도하는 높다란 위령탑이나 방문객에게 위압감을 주는 엄청난 규모의 위령소 설치는 피해야 한다. 남경대학살 기념관에 세워진 위령제단은 우리가 답습해서는 안 될 전형적인 모델이다.

▲ 야드바셈기념관의 '기억의 전당'.ⓒ최호근

그 다음으로, 기념관의 전시공간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야 한다.

첫 번째 부분은 희생자의 비극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고난의 마당'으로, 두 번째 부분은 ‘나도 가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을 갖게끔 만들어주는 '성찰의 마당'으로, 마지막 부분은 조직과 명령의 논리에 빠지지 않고 자기 양심에 따라 행동했던 '의인의 마당'으로 조성되어야 한다.

이 세 마당은 동선에 따라 이어지면서도, 마당과 마당 사이에는 각각 '추모의 방'과 '성찰의 방'이 따로 마련되어, 희생자와 가해자를 나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둘째, 평화공원은 4·3을 ‘제노사이드의 시대’로 불리는 20세기의 보편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특히 4·3은 냉전의 축도에서 일어난 대표적 참사라는 사실이 조형적으로 명확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화공원 입구에서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작은 광장이 조성되고, 그 광장 가운데는 아르메니아인 학살에서부터 유대인 학살을 지나 코소보 인종청소에 이르기까지, 20세기의 대표적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을 조형화한 입체 이정표가 세워지면 좋겠다. 이정표에 아우슈비츠의 방향이 표시되고, 그곳까지의 거리가 킬로미터로 기록된다면, 평화공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4·3의 보편적 의미를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기념관으로 향하는 길옆에 짙은 색의 각진 나무기둥 100개를 나란히 세워놓고, 각각의 기둥에 1900년부터 1999년까지의 연도를 적은 뒤에, 대표적인 학살사건들을 그 밑에 기록한다면, 전쟁과 학살로 얼룩진 인류의 현대사를 몸으로 느끼기에 좋을 것이다.

셋째, 평화공원은 단순히 학살의 전시장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 원칙은 무엇보다 기념관 내의 공간배치와 동선을 통해 표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기념관 안의 전시는 1947년의 3·1 발포사건과 1948년의 4·3에서 곧바로 시작될 것이 아니라,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고유한 민속, 유구한 역사가 집약적으로 형상화되는 공간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독일 베를린에 있는 '유대인 박물관'을 생각해보자. 이 박물관은 입구에서부터 유대문화의 고유한 전통과 더불어 독일과 유럽 문화 발전에 유대인들이 공헌한 내용들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 뒤에, 뒷부분에 가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던 유대인학살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서사’는 4·3평화공원 조성에도 적용될 필요가 있다. 4·3은 제주의 역사 속에 필연적으로 잉태되어 있었던 사건이 아니라, 냉전 상황 속에서 외부에서부터 갑작스럽게 찾아온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평화로웠던 제주와 비극의 제주를 연이어 배치하는 것은 단순히 전시기술의 문제라고 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세 개의 의미 있는 '마당'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평화로웠던 제주의 모습이 독립적인 공간 속에서 형상화될 때, 방문객들은 4·3의 돌발성과 비극성을 느끼면서 관람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넷째, 기념관 안에서는 물론, 기념관 밖에서도 관람객들의 참여를 유도하고 체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구체적이고도 입체적인 방식의 전시가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면, 입구에서 가상의 통행증이나 도민증을 발급해주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학살 장소가 표기된 지도가 그려져 있는 그 증서의 뒷면에 각 '마당'을 지날 때마다 확인용 도장을 스스로 찍게 한 뒤, 출구를 나설 때 평화공원의 모습이 담긴 직인을 찍어준다면, 어린 학생들의 관심은 크게 높아질 것이다. 미국 워싱턴의 '유대인학살 기념관'은 입구에서 관람객들에게 유대인 여권을 발급해줌으로써, 그들이 유대인의 비극을 자신의 비극으로 느끼도록 돕고 있다.

▲ 야드바셈기념관의 학습관.ⓒ최호근

다섯째, 평화공원의 기능은 전시물을 통해 방문객들이 소극적으로 체험하도록 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의 '야드 바셈'이나 워싱턴의 '유대인학살 기념관', 베를린의 '반제 하우스(Wannsee-Haus)'처럼 직업과 연령에 따라 전문화된 학습 프로그램을 갖추지 못한다면, 평화공원은 김밥 먹고 콜라 마시다 사진 찍고 가버리는 ‘놀이공원’으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방문객들이 아무리 많아도, 인권과 평화를 지향하는 미래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힘은 밀도 있는 학습 프로그램에 참여한 소수의 의식변화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야드 바셈'의 학습 프로그램에는 매년 2000명 이상의 장교후보생이 의무적으로 참여하고,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생에 이르는 청소년들 가운데 상당수도 학교장 재량수업을 활용해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한다. 효과적인 프로그램만 준비된다면, 4·3평화공원은 군과 경찰의 초급간부나 초등학생에서 대학생에 이르는 젊은 세대에게 훌륭한 시민교육의 장이 될 수 있다. 

여섯째, 4·3평화공원이 미래지향적인 기억과 학습의 장으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후세대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의로운 사람들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야 한다.

▲ 치우네 스기하라.ⓒ최호근

일본인들이 본국 정부의 훈령을 어기면서까지 유대인들에게 일본 비자를 발급해주었던 코브노 영사 스기하라를 자랑하고, 스웨덴 사람들이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구출에 헌신했던 왈렌버그를 의인의 표상으로 기억하는 것처럼, 우리도 인간의 도를 지켰던 “선한 이웃”을 자랑스럽게 기억해야 한다.

만약에 죽인 사람과 죽은 사람만 기념한다면, 그곳은 결코 평화를 위한 공원이 될 수 없다. 올바른 삶의 태도와 방향을 가르쳐준 어린시절의 은사처럼, 올바른 가치기준을 몸소 보여준 의인들이 4·3기간동안 있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이요, 고마운 일인가?

<제주의 소리> 4.3특집에 소개됐던 문형순 서장, 김익렬 연대장, 김성홍 구장, 장성순 경사, 강계봉 순경, 김남원 민보단장, 조남수 목사, 그리고 신례2리 주민들. 평화공원의 기념관 안에 이 소중한 분들을 위한 기억의 전당을 마련하고, 옥외에도 이들을 기리는 아름다운 동산을 조성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세계적인 기념관들과 기념공원들이 오랜 시행착오를 통해 얻은 경험적 지혜의 결정체이다.

▲ 코브노대사관앞에서 스기하라의 비자를 기다리는 유대인들.ⓒ최호근
“선한 이웃의 동산”은 이렇게 만들면 좋겠다.    

기념관을 모두 돌아본 방문객들이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커다란 문을 열어야 한다.
문을 열고나면 희미한 간접조명만 비치는 전실(前室)이 나오고, 다음 문을 열면 몇 십 미터 길이의 어두운 터널이 시작된다.
이 터널은 약간 휘어 있어 처음 들어서는 사람에게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이 터널은 희미한 간접조명만 있기 때문에 매우 어둡다.
이 어둠은 4·3의 무게를 느끼게 해준다.
이 길을 지나는 동안에는 누구나 침묵해야 한다.
모든 방문객은 이 어둠의 터널에 들어서기 전에 입구에서 건네받은 마스크를 착용한다. 
터널의 바닥에는 수많은 모난 자갈들이 깔려있다.
이 자갈들은 4·3 희생자들을 의미하며, 자갈들을 밟을 때 나는 소리는 희생자들의 비명을 생각하게 해준다.
그 터널의 끝에서는 희미한 빛이 비친다.
터널 끝의 문을 열면 자연의 빛이 밝게 비치는 바깥 공간이 펼쳐진다.
출구 바깥에는 약간 경사졌지만, 가파르지는 않은, 어린아이라도 걷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언덕길이 나있다.
그 길을 따라 양 옆에는 철을 타지 않는 상록의 나무들이 심겨져 있고, 각각의 나무들 앞에는 위험에 처한 제주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진 작은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어른이라면 그 안내판을 보기 위해 무릎을 낮추거나, 허리를 약간 숙여야 한다.
그 길이 끝나는 곳에는 걸음을 갓 배운 어린 아이라도 걸어 올라갈 수 있는 동그란 잔디 언덕이 있고, 그 언덕 가운데는 상록의 커다란 나무가 서있다.
방문객들은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을 제주의 옥빛 바다와 같은 색의 엽서에 적어 그 나무 가지에 단다.
아니면 학살의 현장에서 가져온 작은 돌조각에다가 느낀 점을 적어 그 나무 옆에 가만히 놓아둔다.
이 돌무덤이 커질수록, 우리의 희망도 그만큼 더 커질 것이다.
이 언덕에서는 봄이 되면, 초등학생들이 바라는 세상의 모습을 그리는 사생대회가 열리고, 임관 직전의 초급장교들이 국민을 위한 군인이 될 것을 다짐하는 엄숙한 의식도 펼쳐진다.
그 흔한 동상이나 돌비석을 굳이 이곳에 만들 필요는 없다.
혹시라도 동상을 만들려면, 주름진 얼굴의 주민이 넘어진 이웃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내밀거나, 촌로가 목말라하는 이웃마을 주민에게 물 한 그릇을 건네주는 모습으로 족하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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