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경제의 생태적 전환1

   
  오늘, 유럽의 작은 나라 스위스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괴물의 탄생>의 저자 우석훈이 한국경제의 대안으로 영감을 얻었다고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제주가 많이 닮았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 때문이기도 합니다.

 승자독식의 토건국가,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 그리고 일반 경제학으로는 해독 불가능한 한국경제. 그래서 모두를 개미지옥으로 몰아넣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잃어버린’ 오늘날 한국경제에 우석훈은 ‘괴물’이란 딱지를 붙입니다. 그리고 이 정신분열증에 걸린 ‘괴물’을 해체시킬 해답을, 우리나라와 여러모로 비교되는 스위스에서 찾습니다. 책거리 겸해서 제 나름 재구성해 올립니다.

스위스는 우리나라와 대단히 비슷합니다. 이렇다 할 지하자원이나 에너지 자원 따위가 거의 없다는 점도, 또 국토의 70% 정도가 산이라서 ‘있는 건 사람밖에 없다’는 한국 교과서와 스위스 교과서의 첫 머리부터 그렇습니다. 한 때 유럽에서 스위스라는 말은 ‘가난하다’는 말과 동의어였습니다. 우리네 보릿고개처럼 겨울이면 산악지역 사람들이 19세기까지도 굶어죽었고, 배가 너무 고파서 아버지들이 다른 나라의 용병이 되어 식구들을 먹여 살리던 슬픈 나라였습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던 시기에 프랑스 왕 옆에서 도망가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다가 전멸당한 군인들은 식구들에게 봉급을 보내야 했던 스위스 용병들, 세익스피어 햄릿에도 나오는 바로 그 ‘Switzers’랍니다.

 또한 한국의 지역감정 문제가 아무리 심하다고 한들, 아예 쓰는 언어조차 다른 스위스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스위스의 공용어는 4개. 북부는 독일어를, 서부는 프랑스어를, 남부는 이탈리아어를 쓰고, 알프스 한가운데는 - 이제는 화석 민족이 되어버린 원래 스위스 민족의 언어 - 헬베티카어를 씁니다. 사실상 한국의 지역감정에 비하면 스위스는 훨씬 구조적인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럼 이 나라는 덴마크처럼 완전히 농업으로 먹고 사는 나라였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겨울이 6개월이나 되는 스위스는 4개월 정도인 한국에 비해 농업 조건이 훨씬 불리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는 알프스 관광 덕분에 먹고 사는 나라일까요? 유럽 국가들의 평균적 관광소득에 비쳐볼 때 스위스가 특별히 더 높지는 않습니다. 그럼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세계의 온갖 검은 돈들이 몰려온다는 비밀계좌나 운용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 먹고 살까요? 스위스의 금융 부문은 국민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정도로 약간 높기는 한데, 이게 엄청나게 심한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스위스의 비밀계좌는 이미 정책적으로 폐지된 상태입니다.
 

   
 농업과 식품안전의 결합을 통한 생태적 전환

  1950년대까지 그저 독일이나 프랑스의 ‘위성경제’ 정도로 간주되었던 스위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스웨덴과 더불어 가장 먼저 국민소득 4만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스위스 하면 잘사는 나라, 이렇게 된 건 불과 20년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원래 잘 살았잖아”라고 얘기할 수 없는 거의 유일한 나라. 언어가 전혀 다른 세 지역의 협력위에 서 있는 국가. 이런 스위스가 경제를 개방하고, 그 개방의 힘으로 안정적이고 인간적인 지금의 번영을 이뤄낸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스위스는 전통적으로 평화외교를 모토로 고립주의 정책을 택하면서 UN에도 2002년에야 가입했습니다. EU에는 아직 가입도 안했고, FTA는 국민투표로 사실상 부결해버렸습니다.

 스위스 경제를 움직이는 건 다름 아닌 협동조합. 재작년 8월, 스위스의 유통시장에는 큰 이변이 생겼습니다. 세계 2위의 글로벌 유통업체인 까르푸가 스위스에서 철수 결정을 내린 겁니다. 그런데 까르푸를 인수한 업체는 놀랍게도 민간대기업이 아닌 협동조합. 스위스는 지역 밀착형 협동조합을 통해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지난해 스위스 생활협동조합 미그로스는 2백만 조합원을 달성했습니다. 인구 8백만인 나라에서 전 국민의 26.6%가 협동조합 조합원이라는 말입니다. 스위스에선 미그로스가 제공하는 몇 가지 서비스 없이 살아가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미그로스 체인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미그로스가 제공하는 서비스는 음식, 금융, 레저, 문화, 휘발유와 난방용 연료, 가구, 스포츠 용품, DIY 상품, 전화서비스, 휘트니스 클럽, 어학강좌까지 폭 넓습니다.

  또한 어느 지역에서든 가게가 협동조합에 가입하면 지역주민으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대형할인매장이 가난한 사람들의 경제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전통 가게나 소형 매장을 온통 잡아먹어버린 우리와는 정반대. 일반 슈퍼나 가게 어디에서든 밀가루나 쇠고기 혹은 유제품을 고르더라도 그렇게 비싸지 않은 가격으로 안전한 식품과 식재료를 살 수 있는, 이른바 농업과 식품안전의 결합을 통한 생태적 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사회가 다름 아닌 스위스입니다. 한국에선 광우병과 유전자 조작식품이 싸기도 할뿐더러 과학기술이 발전하는 길이라고 말하지만, 거기 스위스에서는 국민투표를 통해 농업을 살려내고 이로써 국민들의 식품안전을 보장하겠다는 그런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가 알프스에 스키장과 산악철도를 엄청나게 만들어 관광으로만 먹고산다는 건 오해입니다. 최근 스위스는 관광산업이 국민경제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알프스의 생태복원을 이웃 국가들과 국가 간 협약방식으로 추진 중입니다. 국토의 생태적 복원을 통해서 건설 산업을 새롭게 복원기술 쪽으로 전환하는 중입니다. 건설을 안 하면 건설사가 망하지 않을까 싶지만, 복원이 건설만큼 큰 산업으로 부각될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노동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 …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

  스위스는 실업률이 2% 정도이지만, 마찰적 실업을 제외하면 대체로 완전고용에 가깝고, 무엇보다 직업에 대한 귀천이 거의 없는 사회입니다. 누구든지 한 가지 일만 제대로 하면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는 해방되고, 아이와 가난한 사람은 국가의 일도 아니고, 주정부로 정의할 수 있는 칸톤(Canton)의 일도 아니라, 지역 공동체의 일입니다. 사치하는 사람도 없지만, 일하겠다는 생각만 있으면 지역의 공동체가 어떤 식으로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줍니다. 세련된(?) 우리들 시선으로 보면 답답하고 멋지지도 않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지만, 스위스에서는 누구나 먹고 입고 교육 받는 데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습니다.

 단적으로 스위스의 대학등록금은 우리 돈으로 연간 50만원 정도. 대학진학률도 많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 비율이 18-20% 정도입니다. 우리나라는 거의 80% 가까운 대학진학률을 보이는데, 기계적으로 비교하면 한국의 대졸자들이 스위스의 고졸자들에 비해 절반의 생산성도 올리지 못하는 셈입니다. 평생 같은 일을 하면서 사회적 마에스트로 시스템을 운용하는 이 고졸자들이 바로 그 유명한 스위스제 ‘맥가이버 칼’, 밀리터리 시계, ‘에망탈’ 같은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이거나, 1억 원에 가까운 가격의 엠프와 스피커를 만드는 골드문트사의 기술자들입니다. 그리고 세계 5위권 내에 들어가는 스위스 연방은행의 은행가들도 상당수는 고졸자들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일부이지만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
“제가 만났던 취리히 공과대학의 한 전문사서가, 자신의 두 아이가 좀 더 자랄 때까지 일 주일에 이틀만 출근하는 방식을 계속하겠다고 하더란 거지요. 7일 가운데 2일만 일한다고! 정규직인 그녀는 임금 수준의 1/3 정도를 포기하는 대신 일주일에 닷새를 쉬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겁니다. 남편의 월급과 합치면 그런대로 살 만하고, 그 대신 습관적으로 카페에서 마시던 에스프레소만 좀 줄이면 된다는 식이더군요.”

 전문직과 문화계를 중심으로 그런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들’이 스위스에서는 늘어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주 5일제가 도입되면서 ‘일주일에 이틀 노는 사람’들이 생기면 노동시간이 줄어서 큰일 난다고 하고 있습니다.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시기에는 반복해서 같은 일을 하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노동시간을 늘리는 전략이 유효하지만, 지식경제를 축으로 하는 오늘날은 다른 생각과 다른 발상 자체가 경제의 중심축이 되는 세상입니다. 불행하게도 지식경제에서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과 ‘일주일에 이틀 노는 사람’이 경쟁하면 누가 이길까요? 당연히 이틀 일하는 사람이 이길 겁니다. 문화적 풍성함과 많은 독서, 그리고 여유로움 속에서 나오는 발상의 전환을, 일중독이 아니면 밀려나서 죽는다며 기계적으로 왔다갔다 출근하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이기겠습니까?
 
 스위스에서 배우자!

   
  이렇게 본다면, 한국은 죽어라 일해도 절대 스위스를 이길 수 없는 사회경제적 조건에 처해 있는 셈입니다. 지식 투입을 늘리고 숙련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쉬는 시간을 늘려주고, 그 대신 창조능력을 최대한 보장해 줄 수 있는 방식으로 가야 하는데, 한국은 집값과 사교육비를 더 올리고, 노동시간과 노동 강도를 억지로 높이는 방식으로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에너지와 자원을 계속 투입하기 위해 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자원외교에 매달리며, 국내 정책 기반과 공공성 기반을 없애는 FTA 중심의 국민경제를 기획하고 있는 우리의 앞날을 생각하면 솔직히 암울해 집니다.

 한 마디로 스위스의 국민경제 운용방식과 사회적 삶은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 식품을 중심으로 농업의 재발견이 이뤄지는 사회이고, 노동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을 만들어내는 사회입니다. 그만큼 우리에게 대안 경제를 향한 또 다른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어찌 보면 여러모로 상당히 비슷한 한국과 스위스지만, 지난 5년간은 가장 극단적으로 다른 경제구조와 경제적 성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두 가지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는 직접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자치에 근거한 분산적 구조이고, 또 다른 하나는 지역공동체 혹은 지자체의 힘으로 만들어진 제3부문의 존재입니다. 이곳에선 실업자가 되거나, 아프거나, 여하튼 뭔가 불편한 게 있을 경우, 시청에다 말하면 지역공동체에서 어떤 식으로든 해결해 주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다국적기업 네슬레와 같은 대기업도 있고, 공공부문을 장악하고 케인즈형 복지국가를 추진하는 정부도 있지만, 그와 더불어 무엇보다도 스위스에는 직접민주주의에 근거한 자치의 힘으로 일궈낸 협동조합 같은 제3부문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지역경제의 생태적 전환... 우리가 스위스에서 배워야 할 건 바로 이게 아닐까요? 생명과 평화가 만난다면, 그건 바로 스위스에서 비로소 제대로 된 손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한 쪽에선 전쟁을 머리에 두면서 국가 안에서 생명을 얘기한다는 건 모순입니다. 그 모순을 극복한 거의 유일한 국가가 스위스입니다. 직접 민주주의와 지역 공동체를 강화시키면서 생태적 전환이 평화와 만나고, 그 과정에서 다양성이 꽃필 수 있는 그런 변화를 생각한다면 그건 스위스에서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제주는...

  해마다 여러 기관에서 ‘삶의 질’이란 걸 조사하는데, 보통은 스위스의 취리히와 로잔이 번갈아 가면서 1, 2등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삶의 질’과 같은 고상한 단어가 아니라, 고통지수 혹은 신경성질환발생률 같은 것으로 ‘삶의 고통’을 짚어보기에 훨씬 알맞습니다. 일을 많이 시켜도 좋으니 일할 자리라도 달라고 절규하는,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입니다. 한국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점차 괴로워지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취리히나 로잔이 서울과 다른 점은 지역을 일방적으로 착취하면서 비대해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여기에서 지역 공동체의 직접 민주주의 힘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서울을 개미지옥으로 정의한다면, 서울과 모든 게 정반대인 곳이 바로 취리히입니다. 취리히의 모든 게 정확하게 서울과 정반대라고 보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제주대 송재호 교수가 ‘녹색성장과 제주의 선택’이란 강연에서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제주는 쉽게 말하면 서울하고 반대로 가면 됩니다. 제주에 관광 오는 사람들은 다 서울과 같은 도시 사람이지요. 제주가 서울과 똑같으면 오지 않아요. 그러나 제주를 서울과 반대로 만들어 놓으면 오지 말라고 해도 와요.”
 
 
 7월 첫째 주 토요일, 바로 어제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이익을 대변하고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협동조합의 가치와 역할을 널리 알리는
‘국제협동조합의 날’입니다.

생명과 평화가 깃들고, 나눔과 보살핌이 넘쳐나는
‘모두를 위한 제주’를 꿈꾸어 봅니다.
협동적 자치 ‘수눌음’과 생태적 순환경제 ‘돗통시’
창조적 복원이 필요합니다.

하루하루 발걸음은 더딘데, 언제나 마음만 앞서 갑니다.
‘여럿이함께’하면 길은 등 뒤에 보입니다.
   
 2010년 7월 4일 아침에, 연동 집에서 강종우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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