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예비검속 양민학살과 국방부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서귀면 중문면 남원면 등 3개 면에서 예비검속됐다가 학살당한 82명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한 '제60주기 삼면원혼합동위령제'가 어제(26일) 서귀포시 하원동에 있는 위령제단에서 열렸다. 이 위령제에는 우근민 제주도지사와 양성언 교육감, 장정언 4.3평화재단 이사장, 홍성수 4.3유족회장, 위성곤 오충진 윤춘광 도의원을 비롯해 삼면 유족과 관련단체 대표 등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는 정복을 입은 해군 준장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김태영 국방부장관의 추도사를 대신 읽기 위해 제주방어사령부 사령관 황우현 준장이 장교 대여섯명을 대동하고 참석한 것이다. 추도사 낭독 순서에 따라 황 준장이 단상으로 나갔다. 정복을 입은 군 장성이 4.3 관련 위령제에 참석한 것이 의미있어 보인 탓인지 사진기자들이 몰려들어 연신 셔터를 눌러댔다.

국방장관의 추도사는 "우리 민족의 비극인 6.25전쟁의 와중에서 군에 의해 발생한 불행한 사건으로 인하여 안타까운 희생을 당하신 분들의 명복을 삼가 빌며, 유가족 여러분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로 시작되고 있었다. 추도사는 이어 "국방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유족회의 진상규명 활동과 정부의 관련 노력에 따라 희생자 및 유가족들의 명예가 회복됨은 물론, 희생자들의 넋을 달랠 수 있게 되어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면서 명예회복을 치하했다.

황 준장은 "오늘 이 자리는 우리 군이 국가방위를 확고히 하여 적의 위협으로부터 영토와 주권을 수호할 때만이 이러한 비극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고 추도사를 이어갔다. 이 추도사는 "유가족과 제주도민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리면서 이번 추모위령제가 국민의 화합과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원한다"고 마무리했다.

국방부장관의 추도사는 얼마 전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예비검속 희생자들에 대한 진실규명을 통해 1950년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에 의해 학살됐음을 확인하고 국가가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추도사에서는 사과의 표현은 한마디도 없었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추도사 어디에도 사과는 커녕 '유감' 조차 표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적의 위협으로부터 영토와 주권을 수호할 때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표현은 어쩐지 섬뜩하게 들렸다.

당시 정부는 전쟁이 발발하자 후방의 치안을 명목으로 '불순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곧이어 재판도 없이 학살하고 말았다. "적의 위협으로부터 영토와 주권을 수호한다"는 명제 앞에서는 어떤 것도 용납될 수 없었다. 추도사마저 이를 강조하고 있었다. 만약에, 만약에 또다시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영토와 주권의 수호"를 이유로 한국전쟁 당시와 같은 '처리'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로 들린 것은 과민한 탓인가.

이곳 희생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공무원 교사 학생 부녀자까지 포함돼 있던 예비검속 대상자들은 '과거 범죄사실이 없으나 태도가 애매'하다거나, '삐라 살포 사건의 혐의자로 조사 중'이거나, 술자리에서 경찰관과 언쟁을 한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귀포경찰서에 잡혀 들어갔다가 곧바로 제주지구 계엄사령부로 넘겨져 한꺼번에 학살을 당한 것이다.

가족들은 무슨 이유로, 어디서, 어떻게 죽임을 당했는지도 모른 채 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50여년이 지난 뒤에야 정뜨르 비행장(현 제주공항)으로 끌려가 구덩이에 켜켜이 쌓인 유골로 발견됐다. 희생자의 도장이 구덩이에서 유골과 함께 발견되고 유전자 감식을 통해 13명의 유족들이 희생자의 유골을 찾았다. 유해도 찾지 못한 유족들의 피눈물은 50여년이나 마르지 않았다.

이들을 앞에 두고 60주기 위령제에서 당시 학살의 주범인 군을 대표한다는 국방장관의 추도사는 최소한 먼저 사과를 한 뒤 위로를 하건 당부를 하건 할 일이다. 군은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자행한 반인륜적 범죄행위에 대해 왜 사과 한마디 하지 않는가. 영토와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유족들은 용서를 얘기하고 화해와 상생을 선언한 지 오래다. 그런데 군은 왜 사과하지 않는가.

▲ 고희범
국민의 믿음을 잃은 상태에서는 국민 화합, 국가발전의 원동력 따위를 기대해선 안된다. 전쟁범죄에 대해 주변 피해국들을 상대로 두고 두고 사죄하는 독일이 유럽에서는 주변국의 신뢰를 얻는 반면, 자신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사죄는 커녕 전쟁을 정당화하면서 오히려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다음 달에는 같은 이유로 불법구금된 뒤, 같은 방법으로 학살당한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백조일손유족회와 만뱅디유족회의 60주기 위령제가 열린다. 제주도민과 함께 군의 태도를 주시하려 한다. /고희범(제주4.3범국민위 공동대표, 제주포럼C 공동대표)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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