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플레이션이란 새로운 복병

27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Jackson Hole)에서의 벤 버냉키 의장의 발언은 여러 면에서 매우 주목할 만하다. 그는 연방준비은행 기준금리(fed-fund rate)를 현재의 수준으로 향후 상당기간 동결하겠으며 또한 장기 국채 등을 시장에서 계속 사들여 장기금리도 최대한 낮게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분명히 밝혔다.

잭슨홀 모임에 대한 세계 금융시장의 관심은 매우 컸다. 미국과 유럽의 중앙은행들, IMF, 세계은행 등의 대표가 전부 모이는 자리였음은 물론, 무엇보다 금융위기의 장본인인 미국이 현재의 경기국면을 어떻게 보고 있으며 그에 따라 출구전략을 앞으로 어떠한 방향으로 취할 것인지를 다들 궁금히 여겼던 때문이었다.

미국에 출구전략은 없다

그의 대답은 한마디로 ‘출구전략은 당분간 없다’였다. 이는 며칠 전 폴 크루그만 교수가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그에게 주문했던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 크루그만의 주장은 이렇다.

실업을 줄이려면 최소 2.5%의 경제성장이 있어야 하는데 미국은 아직 2%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정부의 경기부양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장단기 금리를 현재의 초저금리 상태로 유지하겠다는 당국의 의지를 분명하게 시장에 밝혀야 하며 기왕이면 인플레이션에 관해서도 새로운 메시지를 시장에 던져야 한다. 즉 정부가 용인하는 물가상승률을 어느 선 이상으로 높게 책정해서 발표함으로써 민간부문의 현금보유가 불이익이 되도록 만들어야 시중에 돈이 더 쉽게 풀린다는 것이다.

미국의 7월 실업률 9.5%는 구직을 포기한 사람들을 제외한 통계로서 이 사람들을 포함하면 실제 실업률은 두 자리 숫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또한 6개월 이상의 장기 실직자가 전체 실업자의 거의 절반에 달하는데 이는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후 최대기록이라고 한다. 실업률의 감소를 경기회복의 핵심 잣대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

버냉키의 발언 중 주목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디플레이션에 대한 언급이다. 물가는 건강한 선에서 약간씩 올라주는 것이 바람직한데 최근의 물가 동향은 그 적정선을 밑돌고 있다. 따라서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 중에서 고른다면 디플레이션 쪽을 더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의 잭슨홀 발언에 노골적으로 담겨 있다.

이번 글로벌 경제위기 중 ‘디플레이션’이라는 단어가 최고위급 정책당국자의 입에서 나온 것은 처음이다. 미국의 2분기 소비자물가지수 111.7은 전년 대비 1.0% 상승에 그쳤으며 금년 7월 중에는 111.6으로 낮아지기 시작했다. 미국이 결코 닮고 싶지 않은 모델은 일본의 디플레이션이다. 2000년을 100으로 한 일본의 소비자물가지수는 금년 7월 96.7에 머물고 있다.

디플레이션은 상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 발생한 상품가격의 하락이 생산량의 감소와 임금감소를 가져오고 이것이 다시 구매력 감소를 초래하는 디플레이션 소용돌이(deflation spiral)를 야기하므로 의당 경계의 대상이다.

유명한 어비 피셔의 이론 중에 부채 디플레이션(debt deflation)이라는 것이 있다. 과도한 부채를 일거에 줄이려는 노력이 중첩될 때 디플레이션이 발동된다는 이론이다.

채무자들이 지레 겁을 먹기 때문일 수도 있고 불안해진 은행들이 채권회수에 나서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모든 구매력이 상품구매보다는 빚의 청산에 동원되므로 상품가격이 하락할 수밖에 없다.

비약해 풀이한다면 벤 버냉키의 양적 완화(QE) 해법은 부채 유지의 해법에 다름 아니다. 부채의 거품도 언젠가는 붕괴될 것이지만 지금 붕괴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해법이 아니라 문제의 연장일 뿐이다.

부채 디플레이션을 경계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제주의소리
시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전세계의 펀드자금의 흐름을 추적하는 EPFR 글로벌이라는 회사에 의하면 금년 들어 220억달러의 자금이 주식시장에서 이탈했다. 미국주식 펀드가 510억 달러 감소한 반면 개도국(emerging) 주식은 370억달러 증가한 결과다. 그 대신 채권펀드는 2580억달러 증가했다.

디플레이션 위험이 없지 않으므로 부채를 서둘러 줄이지 않도록 양적 완화를 하겠다는 버냉키의 해법은 부동산 가격하락을 막기 위해 주택금융의 총부채상환비율(DTI)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우리나라 정책당국의 해법과 맥을 같이 한다. 시장의 불안이 쉽게 가실 것 같지는 않다. / 김국주 전 제주은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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