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JDC글로벌아카데미] (25)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가 부친 박목월 시인과의 따뜻했던 어린시절 이야기를 풀어놨다.

7일 서귀포시 남원읍 제남도서관에서 열린 서귀포JDC글로벌아카데미 강단에 선 박 교수는 “박목월 선생은 성격이 비단같아 누구에게도 반말 한 번 안하고 살았다. 나는 글쓰는 집안은 가난한 게 당연하다고 여기며 자랐다. 하지만 박목월 선생과 함께 내 생애 가장 기뻤던 날을 보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아버지 박목월을 ‘선생’이라 불렀다.

박목월 시인은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며 문학계에 족적을 남겼다. ‘하관’ ‘나그네’ 등은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그의 대표작이다. 아들 박동규 교수 역시 커서 시를 쓰는 글쟁이가 됐다.

▲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시인은 지금이나 예나 가난한 직업이었다. 박 교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 역시 '가난'에서 시작된다.

크리스마스는 가난했던 시인의 집안에서 유일한 ‘선물 받는 날’이었다. 어느날은 까만 구두가 갖고 싶어 일년을 기다려 크리스마스에 사달라고 할 샘이었지만 철 없는 동생이 비싼 ‘털 오버(외투)’를 갖고 싶다고 말하는 바람에 가난한 아버지에게 부담이 될까 ‘큰 장갑이 갖고 싶다’고 했단다.

박 교수는 “시인이 돈이 몇 푼 있었겠나. 털 오버를 사달라고 하니 돈이 없던 선생은 노트와 펜 들고 하얗게 돼 덜덜 떠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너무 부끄러워 노트에 얼굴을 묻었다. 안 사준다 할 수 없어 ‘그래, 사줄게’ 하는데. 그 앞에서 구두를 사달라고 할 수 없었다. 그날밤 방에서 서럽게 울었다. 박목월 선생이 방안에 조용히 들어와서, ‘이게 울고 있었구나’ 그러시더니 손으로 눈물을 닦아준다. ‘이게 철이 들었지’ 하면서 같이 울었다. 그게 가장 기뻤던 날이었다.”고 회상했다.

▲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시인인 그에게 가족은 감정을 드러내고 서로의 상처를 돌보는 것이다. 그는 “(요즘엔) 가족들 사이에서 느낌을 드러내는 언어들이 없어졌다”며 ““진짜 가족이란 ‘핏줄’이란 이유로 돌보는 ‘동물적인’ 것이 아니다. 여러분 남편이나 부인, 아이들의 마음을 아시나요. 마음도 서로 통하지 않고 살아가는 경우는 없습니까. 그것은 가족이 아니다. 인간적인 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밖에 나와 사회적 존재로 나와 살고 있는 것은 ‘탈을 쓴 얼굴’이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만든 얼굴이다. 조선시대에 양반하고 상놈이 살 때. 상놈이 양반 욕하면 그자리서 때려 죽었다. 탈을 만들어 쓰고 연희를 통해 욕하면 용서받았다. 집에 가면 탈을 벗어던진 참다운 나의 모습을 드러낸다. 상처도 있고 좌절도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 삶의 상처를 입고 흉터를 갖고 산다. 서로 밀어주고 기뻐해주고 위로해주고 이런 것을 하는 집입니까. 사회에서 지내던 얼굴 그대로 집에 가면 상처가 보이느냔 말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들에게 가난은 설움이나 어두움 같은 것이 아니었다. 박 교수에게는 가난했지만 가난을 모르고 살게 했던 어머니도 있었다.

국민학교 입학할 때 신을 신발이 없어 그의 어머니는 시집 올 때 입고온 비단 치마를 자르고 바느질 해 비단 신발을 만들어 신겼다. ‘중국놈 같다’며 놀려대는 친구들 앞에서 내성적이고 부끄럼 타던 어린 박동규에게는 상처였다. 등교 후 석달 반을 신발 보여줄 수 없어 밖에 나가지도 않았다.

선생님에게 이 얘길 전해들은 어머니는 신발을 제대로 못 신어 석달 반이나 교실 안에 쳐박혀 있던 아들을 기억하며 얼굴이 굳어졌다.

▲ 박동규 서울대 명예교수.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그날 이후 그녀는 박목월 선생이 쓰다 버린 원고지를 어머니가 주워 모았다. 안방 경대 옆에 쌓기 시작했다.

어린 아들이 “오늘 미술시간인데 크레파스 들고오래요”하면 어린 박동규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끌고 갔다. 경대 옆에 쌓아놓은 원고지 위에 두 손 올려놓으며 “우리집은 글 쓰는 집이라 사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나는 ‘돈이 없어 못 사준다’ 소리는 듣지 않았다. 가난의 설움이나 가난이 주는 어두움, 속쓸임은 경험해 본 적이 없다. ‘글쓰면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거다’라고 알고 자랐다. 긍정적인 사고밖에 배운게 없다”고 말했다.

▲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그는 “내 얼굴에서 아직도 순진한 부분이 남아있다면 우리 어머니가 그려주신 거다. 산다는 것은 이거다. 옷 좋은 것 입어봤자다. 살아가는 모양, 꼴을 만들어가야지....”라고 말했다. 일순 장내는 숙연했다.

박 교수는 덧붙였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기에 사는 것이 아니다. 큰 집이 있어도 행복해야 그 집의 주인이 된다. 암만 큰 집이 있더라도, 그 돈으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아야 비로소 사는 것이 아닌가...” <제주의소리>

<이미리 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제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