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33) 신양리 본향당

▲ 신양리 본향당 ⓒ제주의소리

제주도 동쪽 끝에 유명한 섭지코지와 태평양을 품고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하는 마을 신양리가 있다. 이곳의 경치는 성산일출봉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비경 중 비경이다. 설촌된지 100주년이었던 2004년에는 섭지코지 입구에 설촌기념비도 세웠다. 처음에는 고성리 사람들이 1894년부터 내려와 바닷일을 하면서 살다보니 점점 가호 수가 늘어나 1933년에 고성2구로, 그 후에 1951년에 독립된 행정리인 신양리가 되
었다. 신양리사람들은 관행적으로 아직까지도 예전 고성리 번지를 쓰고 있어 공무원들이 새 번지의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 호별 방문을 하고 있다.

고성리와 신양리는 어촌계가 하나다. 공동어장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다. 해방 전에는 어업권이 신양리보다 고성리가 강했는데, 고무옷을 입으면서 고성리가 신양리에 밀리고 있는 형세다. 어촌계원 수효도 역전되어 고성리보다 신양리가 더 많아지고 있다. 잠수회장은 고성, 신양 2인이 맡는다. 오인순(1934년생, 여)의 친정어머니가 상잠수로서 잠녀회 책임자로 있을 때, 미역을 몰래 캐다 들키면 구장에게 벌금 열냥을 내야 할 정도로 잠수회 규율이 엄격했다고 한다.

신양리 새개 포구 주변에는 신양리 본향당과 돈물깍 일렛당이 좌정해 있다. 원래 신양리의 본향신은 수산리이나, 거리가 먼 관계로 신양리 새개 포구 앞으로 본향신을 모셔 왔다. 정월 2일에는 신과세제, 정월 보름날은 하르방이 들어오는 굿을 하고, 2월 보름날은 하르방이 나가는 굿을 마을에서 관장한다. 오인순(1934년생, 여) 씨로부터 신양리 마을굿에 대해 들어 보았다.

2월 보름날은 하르방을 모셔서 놀아난 다음 1m 정도의 배를 만들어 소금, 물, 미역, 청각, 좁쌀, 보릿쌀, 산디를 넣고,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띄우고 돌아오는 행사를 한다.

신양리 본향당을 맨 심방은 신양리 양씨(1934년생, 여)와 온평리 강씨이다. 원래 고성리에는 남자 심방들이 많았는데, 다 돌아가셔서 맥이 끊어졌다. 먼저 14일에 일출봉에서 굿을 한 다음 15일엔 신양리 앞 포구에 온다. 이때 목안심방(제주시 심방)도 3명이나 보조로 온다. 굿은 4명의 심방이 한다. 굿의 규모가 커서 외지로 나간 사람들이나 굿 연구가들이 많이 보러 온다. 이날은 몸이 깨끗해야 갈 수 있고, 돼지고기 먹은 사람은 절대 못 간다. 지는 백지, 밥, 생선, 삶은 계란을 준비하고 바다에 가서 지드림을 하고, 용왕님께 기도하고 온다. 정월과세 때는 메, 쌀, 지전, 계란을 준비하고 본향당에 간다.

수산리에서 신양리로 본향당을 옮겨 올 때도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시할아버님이 땅을 기부하여 임시 쉐막처럼 지어서 당을 설립했다. 그 후에 할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김창보 이장 때 마을 명의로 이전했다. 마을에서 땅값을 받아야 한다고 해서 얼마 받은 기억이 난다. 6~7년 전쯤 지금 본향당터로 옮기면서 당집도 새로 지은 것이다.”고 말했다.

신양리 본향당 근처에 있는 돈물깍 해신당은 자식이나 남편이 바다 건너 육지로 갈 때 무사안녕을 기원하러 오는 곳이다. 당 안에는 돌궤가 두개 있는데, 두 곳 모두 지전이 꽉 차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도 당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 김은희

*찾아가는 길 : 성산읍사무소 맞은편 → 창도슈퍼 네거리 → 래미안펜션 → 해녀탈의장 맞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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