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좌절하는 10대들을 생각하며

 나의 10대. 중학교 시절만 해도 난 가족의 총애와 기대를 한껏 받았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나는 선택의 여지없이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가까운 고등학교로 진학해야 했고, 대학 또한 마찬 가지였다. 그것은 곧 나에게 희미하게나마 싹터가던 목표나 인생의 진로 같은 것으로부터 어긋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교 진학 순간부터 난, 삶의 앞날에 대한 꿈 같은 것은 접어버렸던 듯 하다. 당시에는 스스로 인식하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일상의 영위, 학업에 대한 소극적 태도 같은 것들이 어떤 ‘방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성인이 된 이후 가끔 하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유일한 위안은 방문 걸어 잠가 놓고 팝음악에 심취하기, 이성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 불러들인 감상에 젖기, 먼 산을 바라보며 역경의 유학길에 오른 형을 그리워하는 일 따위였다. 설레는 꿈은 고사하고 대학진학이나 학습목표같은 것은 빈방에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채 눈길도 주지 않았던 10대의 그 시절, 나의 허한 심정을 채워준 그것들이 그나마 나의 방황을 조금이나마 줄여줬다.

 지금도 고교시절은 반추하고 싶지 않은 과거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대부분 선생님들의 시선에서 난 늘 ‘예외’였고, 그 ‘밖’에서 난 좌절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학 진학경쟁이 요즘 같지 않던 시절이라 그나마 별 노력 없이, 대학에 진학했고, 그 ‘방황’이 연장될 무렵, 80년대 끝자락의 사회현실에 눈을 돌리면서 다행히 적극적인 삶의 태도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되면서 학교와 교육, 아이들 일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제 내년이면 중학생이 될 딸아이를 보면서 나의 10대 시절을 간혹 떠올리곤 한다. 그러던 중 어느 우연한 자리에서 제주의 10대 중 상당수가 이미 고등학교를 진학하면서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학교를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이후, 10대들의 삶에 조금씩 다가가게 되었다.

  어느 조사에 따르면, 인구 50만 남짓 제주의 청소년 가운데 매년 300명에서 500명의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있다. 교육청에서 청소년 복지를 담당하는 한 후배는 제주도내 어느 전문계고의 경우, 학생 스무 명 중 다섯 명만이 학교에 남는다는 충격적인 얘기를 전한다.

 실상이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봤다. 2005년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가정해체, 학업중단, 가출, 폭력, 성폭력, 범죄, 자살의 문제를 가진 이른바 ‘高 위기군 청소년’이 42만명에 달하고 있다. 그나마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이런 식으로 갈 수 있는 아이들이 126만명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청소년 다섯 명 중 한 명이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신고된 가출 청소년만 1만5천명여명, 그나마도 해마다 3000명이 증가하고 있다. 학교로부터 벗어난 아이들만 3만명이 넘고, 정부 통계에 잡힌 ‘학교 밖 청소년’은 7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자신의 삶에 의미는 어떻게 부여잡고 있을까? 거리의 사람들은 그 아이들과  어떤 시선으로 마주할까? 학교는 언제까지 그 아이들을 내버려 둘 참인가? 도대체 학교나 사회의 어떤 문제가 그들을 ‘낙오자’로 몰고 갔을까?

 우리사회의 양극화 수준은 첨예해 질 때로 첨예해졌다. 아이들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대리운전 ‘투잡’까지 마다치 않는 삶의 모습은 차라리 평범한 축에 속할 것이다. 지금 이 시간에도 거리에서 좌절하는 10대의 아이들이 있다. 그나마 학교에 남아 있는 이들 중에도 관심 ‘밖’의 자신을 방치한 채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며 좌절하는 친구들이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가장 첨예한 칼끝에 선 이들은 바로 그 아이들이 아닐까?

 10대야말로 가장 빛나는 시기이어야 하지만, 어느덧 우리사회 10대의 상당수는 이미 스스로를 ‘실패자’로 규정하고 좌절의 삶을 겨우 지탱해가고 있을 뿐이다. 더 이상 우리사회의 10대는 꿈을 키우고 설계하는 시기가 아닌, 일찍이 스스로의 삶을 너무도 극명하게 결정해내야 하는 아픈 시기가 아닌가. ‘청소년 문제’는 단지 교육이나 학교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 비용의 문제이고 우리사회 미래와 연결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학교 밖, 혹은 안에서 좌절을 겪는 그 아이들 한 명, 한 명이 지금 이 시간에 얼마나 고통스런 삶을 견디고 있을 지부터 제대로 생각해봐야 할 의무가 우리 앞에 있다.

  내 10대의 방황이란 그래도 조건이나 환경에 지배받는 것은 못되었다. 앞서 방황의 이유로 삼은 내 선택의 속박은 요즘 아이들처럼 ‘알바는 필수’와 같은 차갑고 치열한 모순된 처지에 비해 관용할 수 있는 시절이었으니까. 조건이나 환경보다 스스로의 관념이 우위에 선 방황이란 성인이 된 지금 오히려 삶의 자양이 되었다는 ‘유리한 해석’을 끌어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신념이나 지향과 상관 없이 어떤 환경이나 조건의 지배로서 다가오는 방황이라면,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떠나고, 거리를 헤매고,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회의 문제이고 우리 모두의 엄중한 책임이어야 한다.

▲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집행위원장
 그렇다면 그 사회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일부터 전제되어야 한다. 이는 단지 청소년 단체나 학교교육이나 교육복지의 일이 아니다. 한 삶의 모습, 한 인간의 생애로서 지금 좌절하는 10대의 삶에 동행할 우리의 생각들은 어느 곳에 묻어두었을까?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정책위원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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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에도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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