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밀항' 사연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갖가지 '밀항' 사연에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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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15) 밀항, 그때는 어떤 때...

잘 갔다고 연락 왔다고 한다.
돈 온단다.
1년에 큰 밭 하나씩 산다고 한다.
등록 만들었다고 한다.
비행기 타고 온단다.
비행기 타고 귀국했더니 도지사 부럽지 않았다.

밀항.

제주도 사람 중에서 '우리 집안은 밀항과 관계없다' 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 있을까? 제주도 사람중에 사촌이내 친척 중에 밀항 경험이 없는 집안이 있을까?

당시의 밀항은 제주도 사람들에게 그리 멀리 있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자기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집안 일이었다. 필자 친구도 밀항자가 있었고, 사촌형님도 밀항으로 일본에 갔다 왔다.

필자 사촌형님은 내가 중학교(1960년대)때 오사까로 밀항을 갔다. 결혼해서 아들이 둘이 있는데 삼촌(밀항 본인의 어머님)에게 맡기고서 형수와 같이 밀항을 갔다.

잘 갔다. 돈이 오기 시작했다. 필자가 대학에 입학했을때, 교복해서 입으라고 당시 한국돈 2만원을 보내
왔다. 당시의 교복은 대학생이 심볼이었다. 밀항을 간 형님도 입고 싶었던 교복이었다. 본인이 못 들어간 대학, 본인이 못 입은 교복, 본인을 대신해서 꼭 입으라고 돈을 보내온 것이다.

목숨 걸고 간 밀항, 어렵게 번 그야말로 피나는 돈, 이런 목숨과 같은 돈을 받은 필자는, 지금은 가끔 형님과 싸울 때도 있다. 이런 돈을 받은 내가 형님을 반대해서 싸움을 하다니, 형님에게서 매를 맞아야 될 놈이다.

그후 형님은 일본에서 걸려서 오무라 수용소에 보내졌다고 연락이 왔다. 부산으로 보내지고, 부산에서 제주도로 들어왔다. 제주도에 들어올때 제주항에 마중을 나갔다. 타고 오는 배는 '제주호'였다. '제주호'는 배가 작아서 타고 있는 사람들을 멀리서도 볼수가 있어서 형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배를 내린 형님은, 6살 된 아들들을 안고서 한참을 본인 뺨을 아들 뺨에 대고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형의 품에 안긴 아들들은, 모르는 아저씨 품에 안긴 것이 싫어서 그 품을 빠져 나올려고 안달이었다. 그 모습이 우리를 울리게 했다.

밀항선을 탔다고 다 일본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며, 일본 땅을 밟았다고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밀항은 한국에서도 일본에서 다 불법이다. 한국 경찰도 피하면서 배를 타야 되지만, 일본에 도착했다고 목적지까지 도착되는 것이 아니다.

밀항배를 탈 순간에 한국 경발에 적발되여 철창 신세를 지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이다. 일본 땅을 밟았다고 목적지(예를 들면 오사까)까지 도착된다는 보장이 없다. 땅을 밟고서 좌지우지하는 과정에서 일본 경찰에 잡혀서 오무라 수용소행이 되고만다. 오히려, 일본 땅을 밟고서 좌지우지하는 도중에 잡힌 사람들이 더 많다.

▲ 배 위의 어린이들 봄날 어린이들이 뭍에 올려 놓은 고깃배에 올라 소꿉장난을 하며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 제주의소리

목적지에는 사람 받을 사람이 있어야 된다. 목적지에 잘 도착이 되면 이젠 일을 하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밀항 비용을 갚아야 한다. 일본에서 지불한 돈은 1년 정도 일을 했어야 갚을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후 한국으로 돈을 보낸다. 그러면 1년에 큰 밭 하나는 살수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당시 일본 사회는 어떤 사회였을까?

1960년대 70년대 제주도에는 돈이 되는 산업이 없었다. 농사가 있었지만 제주도 전역은 밭농사이다. 밭농사로는 큰 돈이 되지 않는다. 돈이 되는 산업이라곤 서귀포 감귤이었다. 제주도 전역에서 감귤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당시는 제주도 어느 집도 다 보리밥을 먹었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보면 알수 있다. 필자도 학급 누구도 다 보리밥 도시락이었다. 1974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필자는, 고등학교 졸업할때까지 집에서 보리밥을 먹었다.

그때 일본은 어떤 사회였을까? 일본은 고도성장기였다. 전 세계적으로 공업제품이 부족한 시대였다. 또 일본이 만드는 물건은 어떤 물건도 좋았다. 세계시장에서 일본 제품이 석권을 한 그런 시대였다. 일본은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세계에서 팔리는 시대였다. 노동력 즉 사람 손이 필요 했다. 목적지에 무사히 잘 도착했으면 일은 무궁무진하게 있었다. 오늘 잘 도착했드니 내일부터 일을 가라고 했다고 하는 증언도 있다. 일도 일이지만, 일이 밀려 있었다고 한다. 하루를 쉴려고 해도 주문이 밀려서 하루 쉬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밀항자는 어떤 권리도 없다. 그저 묵묵히 일만 할 뿐이며 또 주장할 권리도 주장을 못한다. 고용자측에서 본다면 부리기 좋은 노동력이다. 알고 있는 일본사람이 있다. 사업관계로 우리 동포와 관계가 있어서, 그 동포의 사업장을 자주 가게 되었는데 그 곳에 밀항자가 일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찌 일을 잘 하는지 그 일꾼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고 한다. 지금와서는 그때 번 돈이 그 밀항자의 수고가 담겨진 돈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만나서 술 한잔 하고 싶다고 말하고 있지만, 찾을 길이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을 했을까? 밀항에 관한 통계는 없다. 추정을 할 수밖에 없다. 제주도 4·3사건때 난리를 피해서 일본으로 밀항을 한 사람들이 약3천명이 란 숫자가 있다(아사히 신문). 그러나 무엇을 근거로 했다는 설명은 없다.

『大村入國者收容所二十年史』라는 책이 있다. 1970년 일본 법무성 오무라(大村) 수용소가 자기들이 직접 만든 책이다. 행정기관이 만든 책이기에 상당히 신뢰성이 있는 책이다. 1950년12월부터 1970년 9월까지 20년간 오무라 수용소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사람은 1만6천4백명이다. 이중에서 1955년까지는 1년에 2천수백명이 송환되었다. 이때는 6·25사변때였다. 1960년까지는 연간 약 1천여명씩 송환된다. 1960년이후 1960년대는 연간 6백∼5백여명정도가 송환된다. 1970년부터는 연간 3백명여명이 된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밀항은 확연히 줄어들게 된다. 또 1988년 올림픽 때를 계기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밀항은 사라지고, 비행기를 타서 맥주 한잔 마셔가면서 일본에 가서 비자를 버리며 불법체재를 하게 된다.

밀항을 간다고 다 잡히는 것은 아니다. 안잡히고 또 무슨 수를 써서 일본에 정착한 사람들도 있다. 무슨 수를 써서 정식 외국인이 되는 것을 '등록' 만들었다고 한다. '등록' 이란 '외국인등록증명서'를 말하며, '등록'을 일본말로는 '도로꾸' 라 읽는다. 외국인등록증을 가진 사람은 일본정부가 인정한 합법적인 외국인이다.

등록을 가진 사람과 등록을 가지지 못한 사람과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이다. 지옥(숨어 사는 사회)과 천당(떳떳한 증명을 가진 사회)의 차이는 상상만 해도 알만 하다.

밀항 길 도중에 일본 국내에서 잡히면 전원 오무라 소용소 행이다. 또 밀항을 잘 와서 일본에 살다가도 등록이 없는 과정에서 잡히면 오무라 수용소 행이다. 등록없이 일본에서 잘 살다가 본인이 자수하는 경우는 오무라소용소를 거치지 않고 연락선 혹은 비행기로 귀국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경우를 자비귀국(자수해서 자기 돈으로 귀국) 이라고 불렀다. 그러면, 밀항을 와서 등록을 만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숫자 또한 추정이다.

▲ 1890년대 산지 포구 산지천 하루에 돛배들이 포구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있다. 해안가로 초가집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다. 출처=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 ⓒ 제주의소리

일본 통계에 일반영주자(5만3천명, 2008년말 통계)가 있다. 일반영주자란 해방후에 일본에 와서 합법적으로 영주허가를 받은 사람이다. 밀항으로 일본에 와서 무슨 수를 써서 처음에 등록을 만들었다고 바로 영주허가가 나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1개월 비자를 몇년간, 다음에 6개월 비자를 또 몇번, 1년비자, 3년비자를 거치게 한다. 이렇게 짧은 기간 비자를 주면서 입국관리청에 오게 하는 것은, 품행이 방정치 못하면 한국으로 강제송환 시키겠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옛날에는 20여년 이상이었다. 최근에는 상당히 짧아졌다(그러나 밀입국인 경우는 10년이상). 이런 긴 기간과 과정을 거쳐야 영주권(일본정부는 영주권이라 부르지 않고 영주허가 라고 부르고 있다)를 신청할 수 있다. 신청해서 이 사람은 일본에 살게해도 일본 국익에 이상이 없겠다라고 판정된 우수 외국인이 영주권(영주허가) 받을수 있다.

일반영주자 5만3천명은 밀항 온 사람만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해방후 밀항이 아닌 다른 경로를 통해서 일본에 와 영주허가를 받은 사람들도 들어가 있다. 결혼등으로 비행기를 타서 온 사람들도 들어가 있다. 5만3천명중 2만명이하가 밀항으로 와서 무슨 수를 써서 등록을 만들고, 품행이 방정하여 영주권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된다. 1950년부터 1970년까지 20년간 오무라 수용소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사람은
1만6천4백명, 1970년대는 1년에 300여명, 10년에 3천여명으로 추정하고 싶다. 그러면 오무라 수용소에서 한국으로 송환된 사람은 약 2만여명. 일본에 밀항을 잘왔고 또 무슨 수를 써서 일본에 영주권을 받은 사람은 2만여명이하, 그러면 밀항배를 탄 사람은 4만여명이하 라고 추정하고 싶다.

그러면 4만여명중 전부가 제주도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람 다 들어가 있다. 그러나 비행기 이전의 밀항때는 전체중에 2/3는 제주도 사람일것이다. 그러면 2만여명이상의 제주도사람이 밀항을 했다고 볼 수 있을까?

당시 제주도 인구는 30만명이었다. 30만명중 나이가 어린 사람과 또 나이가 든 사람은 밀항이 불가능하다. 적령자중에 2만명이 밀항을 했다면 제주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밀항을 했다는 것이 상상이 되리라고 본다.

그러나 밀항은 중독성이 있었다. 목적지에 잘 도착이 되여 살아본 사람은, 걸려서 한국으로 강제송환이 되었던들, 머리속에는 일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또 밀항선을 타게 된다.

어떤 사람들이 밀항 배를 탔을까? 밀항은 한국에서 배 탈때 밀항비용 반을 주고, 일본에 잘 도착했을 때 일본에서 나머지 반을 주는 지불형식이 보통이었다. 비용은, 한국에서 지불하는 돈은 한국에서 약1년간 수입, 또 일본에서는 일본에서 1년간의 수입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요즘 돈으로 생각하면, 한국에서는 배를 탈때 2천만원(한국 돈), 일본에 잘 도착했을때 일본에서 지불하는 돈이 2백여만엔(일본돈) 정도 였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에서 2천여만원정도의 몫돈을 손에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 밀 항이 가능한 것이다. 자기 돈이든 부모 돈이든 이 정도 돈을 동원 할수 있는 사람이라야 밀항배를 탈 수 있었다.

일본에 도착하면, 사람 받을 사람이 있어야 된다. 일본에 아무도 없이 혼자서의 밀항은 성립이 안된다. 일본에 오게 되면 길 모르고 말 모른 사람이 되고 만다. 일본에 왔다고 무엇 하나 할수가 없다. 100% 실패하고 오무라 수용소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어떤사람이 있어서 사람을 받아줄까? 삼촌까지가 한계이다. 사촌이 받아줘서 밀항을 왔다는 사람은 본적이 없다. 또 친구가 받아줘서 밀항을 왔다는 사람도 본적이 없다. 부모, 형제, 부모의 형제까지가 한계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지금 돈으로 2백여만엔을 내여놓으라고 했던들 이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사전에 다 말이 다 되여 있고, 작전이 되여 있어야 가능했던 일이다.

어느 분(제주도 고산 출신) 부산에서 무역선을 타고 밀항을 왔다. 오사카에서 고모님이 조카를 받는 것이다. 어디에서 몇시에 만나기로 약속되 있어서 접선이 되었다. 당시돈 20만엔(당시는 1개월 봉급이 2만엔이 안될때)을 주기로 되여 있었다. 고모님은 20만엔을 가지고 나갔다. 그 고모님, 사정사정해서 만엔을 깎아서 19만엔에 낙착을 보게 된것이다. 지금도 그분, 1만엔 깎은 것을 말하면서 웃는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제주의소리>

<신재경 시민기자 / 저작권자ⓒ제주의소리. 무단전재_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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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kmj 2010-11-05 11:13:37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척박한 제주 사람들의 이야기라 가슴이 아픕니다. 조그만 가내공장에서 일했다고들 하더군요.
61.***.***.13

간천 2010-11-04 18:33:17
잘 읽었습니다. 내가 실제로 일본에 가서 살아보았지만 너무나 절절하게 조사하여 적으셨군요. 살기 위하여 밀항 그리고 수용소 생활 그야말로 어려운 역경을 견디며 제주도의 살림을 도왔던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입니다.
119.***.***.33

제주인 2010-11-04 08:46:07
선배님 반갑습니다 오사카에서 말했던 밀항 이야기가 기사화되니 참 반가우나 슬픈 제주에 역사입니다. 앞으로도 숨은 우리의 역사를 자주 알려 주시면 합니다. 본기사는 저의 어머님에게도 꼭 보여 드리렵니다. 감사합니다.
118.***.***.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