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36) 옷 입는 신목 - 신천리 현씨일월당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현씨일월당 신목 ⓒ김은희

성산읍 신천리는 성산읍의 14개 마을 중 첫 마을로 천미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신천리의 설촌은 1609년(광해군 원년) 남쪽 바다로 들어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천미연대가 설립되면서 연대를 관리하는 사람들과 신풍리 하천리에서 바다밭을 일구겠다는 사람들이 모이면서 형성되었다. 처음엔 현(玄), 고(高), 최(崔) 씨가 많이 살았다.

1915년에 일제에 의해 도제가 실시되면서 정의면 신천리, 1946년부터 행정리 성산면 신천리로 되었다. 신천리에서 아주 특이한 것은 신목을 여성의 신체로 여겨 치마저고리를 입히는 신당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현씨일월당이다.

당신은 천미연대에서 남서쪽에 좌정해 있다. 신목에는 해마다 새 치마저고리를 덧입혀 놓아 상당히 풍성한 모양으로 서 있다. 지난해에 봤을 때는 연두색 저고리에 분홍치마를 입혔는데, 올해는 길게 진분홍 치마만 입혀져 있다. 그래서 시각적으로 선명하고 더 신비로웠다. 마치 거대한 사람이 지켜보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이런 신령스런 분위기 주변으로 삼색 물색천과 지전들이 걸려 있고, 술병들이 쌓여 있는 것
으로 보아 당골이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일은 9월 8일, 18일, 28일이고 제물로는 메 한 그릇과 마른 생선을 올린다.

현씨일월당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는 많다. 저마다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한다. 옛날 현씨 집안에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세 살에 병들어 죽을 듯 하다가 살아나고, 또 열다섯 살에 신
병이 들어 겨우겨우 열아홉 살에 살아났다. 그녀에게 는 오빠가 둘이 있었다. 오빠들은 양반의 가문보다
여동생의 목숨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동생의 병은 심방 노릇을 해야 나을 병이라, 오빠들은 동생을 살리기 위해 육지로 심방 옷을 마련하러 떠났다. 오빠들이 육지로 나가 동생의 옷을 해 입힐 옷
감을 구하여 돌아오는데, 배가 곧 성산면 신천리 포구에 당도할 즈음에 갑자기 광풍이 불어 배가 파산
되고 만다. 동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 길 육지까지 다녀오던 오빠들이 바다에 빠져 세상을 버린 것
이다. 이 소식을 들은 현씨 애기씨는 “나는 살아 무엇 하리오”하면서 바다에 빠져 죽었다. - 『제주도 신당 이야기』(하순애, 2008)

현씨 집에서 심방의 옷을 입어 보지도 못하고 죽은 일월의 한을 달래는 뜻에서 후손들이 당을 설립하고, 신목에는 매년 정월 초에 옷을 만들어 입힌다. 한 맺힌 조상의 한을 풀어줌으로써 후손들의 안녕과 가문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이 크다. / 김은희

* 찾아가는 길 - 신천리 버스정류소 → 남쪽200m 파란색 지붕 창고 옆길 → 천미연대 30m 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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