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 그들은 누구인가] (19) 오무라 수용소 그곳은 어떤 곳

오무라 수용소가 있었던 그 자리는 한국사람을 가두었다가 한국으로 보내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부터 우리 한국과는 인연도 깊은 곳이다.

오무라 수용소가 있는 나가사키(長崎)현 오무라시는, 나가사키시(長崎市)의 바로 옆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가까운 일본은 나가사키이며, 1990년대 제주시와 나가사키시를 2시간만에 달리는 고속배가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

수용소 그 일대를, 호우고바루(放虎原, 방호원) 이라 부른다. 호랑이를 방목한 들판이란 뜻이다. 옛날 임진왜란때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 수길, 豊臣 秀吉)가 조선을 침략했을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부하였던 오무라 요시아키(おおむら よしあき, 大村 喜前)는 조선 호랑이를 생포해 왔다. 그 조선 호랑이를 방목하면서 살게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다. 호랑이를 구경하려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지금 말로 한다면 동물원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 일본군에게 생포된 조선 호랑이는 마음대로 뛰여놀아야 될 조선땅이 아닌 일본땅에서 일본인들의 노리개가 되면서, 갇힌 몸으로 죽어가야만 했던 뼈아픈 곳이다.

또 다른 사연도 있다. 수용소는 1950년 12월 오무라(大村) 해군 항공대의 본관 건물을 수용소로 쓰게 된다. 이 오무라 해군 항공대의 파견대가 제주도 모슬포에 있었던 일본 해군 비행장이다. 제주도 모슬포에 있는 일본 해군 비행장이 파견대이고, 그 본부가 오무라 수용소 바로 그자리이다. 오무라에서 제주도 모슬포까지는 비행기로 그리 먼 거리가 아니라, 옛날 비행기라도 한 시간 정도이면 도착이 가능하다. 제주도 모슬포는 중국 폭격을 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며, 조종사 훈련장이기도 했다. 그 요충지의 본부가 이젠 제주도 사람들을 가두어 놓는 사람 수용의 요충지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래저래 우리 한국사람에게도 제주도사람에게도 뼈 아픈 곳이다.

▲ 나가사키 공항. ⓒ제주의소리/출처=구글 지도

한국사람에게만 뼈 아픈곳이 아니라, 일본사람들에게도 뼈아픈 곳이다. 임진왜란때 조선 호랑이를 잡아온 오무라 요시아키(おおむら よしあき, 大村 喜前) 의 부친 오무라 수미다다(おおむら すみただ, 大村 純忠), 그 부친 오무라 수미다다는 일본 영주로서 처음으로 가톨릭 영세를 받은 사람으로 유명하다(1563년). 영주가 가톨릭 세례를 받았으니, 주민들도 크게 영향을 받게 된다. 이 일대는 신자가 6만명 교회(성당) 70을 넘는, 작은 로마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가톨릭 왕국이 되었다.

조선호랑이를 잡아온 '오무라 요시아키'는 3살때 영세를 받지만, 그후 일련종(日蓮宗)으로 개종한다. 또 1587년부터 일본은 크리스트교 금지령이 내려진다(1587년 풍신수길의 바테렌 추방령). 이 일대의 많은 크리스트교 신자 주민들은,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숨은 신자들이 되고 만다. 이젠 그 숨은 신자들을 찾아내여 처형하는 것이다. 1617년경부터 수백명이 처형되면서 순교하는 것이다. 가장 박해가 심하고 가장 처절하게 순교된 곳이, 오무라 수용소가 있는 호우고바루(放虎原) 라는 곳이다. 그후 순교자들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복자로 모셔졌고, 매년 '오무라 순교제'가 성대히 행해지고 있다.

일본어에 후미에(ふみえ, 踏み繪)라는 단어가 있다. 밟다(후무 ふむ 踏む)와 그림(에 え 繪)가 합쳐진 단어이다. '예수 크리스트' 혹은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나 목판등을 놓고서, 그것을 밟고 넘어가라는 것이다. 그 그림을 밟는 사람은 크리스트교 신자가 아니요, 밟지 못하는 사람은 크리스트교 신자라 하여, 숨은 신자를 색출하는 당시의 방법인 것이다.

그때 유럽으로 보내진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는 일본에는 약30만명의 신자가 있었다고 한다. 1600년경 일본인구는 1천2백만명∼1천5백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크리스트교가 일본에 들어와서 얼마되지 않은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트교에 관심을 가졌는지 알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때 '오무라'는 곳은 한국사람에게도 제주도사람에게도 또 일본사람에게도 한 많은 곳이다. '오무라' 라는 지명은 영주 오무라家에서 유래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이 '오무라' 라는 곳은 그리 특출한 산업도 없으며 큰 도시 나가사키의 주변 도시로서 안주해야만 했다.

▲ 나가사키 공항. ⓒ제주의소리/출처=구글 지도

1900년경부터(1897년부터)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군사도시로서 활기가 나기 시작했다. 1945년 일본 항복, 군부대의 군인들은 전원 해산이 되었지만, 군부대의 건물만 남게된다. 그 군부대 건물을 이용한 것이 '한많은 오무라 수용소' 이다.

하리오(針尾) 입국자 수용소라고 있었다. 해방후 1950년 12월까지는 이 하리오 수용소를 썼다. 1950년은 6·25사변이 일어난 해이다. 한국이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밀입국 할려는 사람이 늘어날 것을 대비한 것은 누구도 상상할 수 있다. 1950년12월 하리오 입국자 수용소에서 오무라로 이사를 하여, 지금까지 「오무라 입국관리센터」라는 이름으로 멋지게 바뀌면서 잘 쓰고 있다. 하리오 입국자 수용소 자리는 '하우스 텐보스 Huis Ten Bosch' 라는 큐슈(九州)를 대표하는 유명한 유원지로 거듭났다. '하우스 텐보스' 는 한국에서도 젊은이들이 많이 관광을 가는 곳이다. 그 한국 젊은이들, 이 자리가 선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한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고생 했던 바로 자리, 바로 그 위에서 지금 우리가 놀고 있구나, 라는 사실이나 알고서 놀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 오무라 수용소가 밀항 가다 걸린 사람만 수용하다가 한국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중에서 불량 외국인을 선별해서 한국으로 보내겠다는 것이다. 불량 외국인이란 일본 형사법을 위반해서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치면 석방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오무라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배를 태워 본국(한국)으로 보내겠다는 사람들인 것이다. 재일동포 중에는 대다수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어밖에 못하는 동포들이다. 오무라 수용소에는 밀항으로 잡혀 한국으로 강제송환되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형법위반자로서 형기를 마친 동포들도 있었다.

1950년12월부터 한국으로 강제송환이 시작된다. 1952년3월까지 7번에 걸쳐 밀항자 3188명과 형법위반자 동포 445명이 강제송환되었다(吉留 路樹 저,大村朝鮮人收容所, 46∼47쪽). 이때까지도 한국에서 형법위반자 동포들을 아무소리 없이 받아주었다.

다음 번부터 문제가 발생된다. 8차는 1952년5월에 410명(이중 동포 형법위반자 125명 포함)이 한국으로 송환되었는데, 한국정부에서 밀항자들은 인수를 했지만, 형법위반자 동포 125명의 인수를 거부한 것이다. 거부한 이유는 생활기반이 없다는 것과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 살다가 일본형법을 어겨 일본법으로 처벌받은 사람의 문제는 일본의 문제이다, 라는 것이었다. 할수 없이 125명을 태워간 배에 태워서 그대로 데리고 왔다. 이들로서 본다면, 일본에 생활기반이 있는 동포로서 형법을 어겼지만, 재판을 받아 교도소에서 형기를 마쳐 출소를 해서 자유의 몸이 되어야 될 것이지만, 외국인이란 이유때문에 오무라 수용소에 다시 수감, 또 한국으로 보내졌다가 상륙도 못하고서 돌아온 사람들인 것이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한국으로 데리고 갔지만 한국에서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것은, 이제 수용을 해야할 근거(명목)가 소멸 했으니 곧 석방하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 주장을 들어줄 일본정부가 아니다. 이젠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이 난동에 민전(民戰, 조총련의 전 조직)계 동포 150여명(오무라 수용소 발표 숫자, 실제는 수백명)까지 외부에서 즉시 석방하라는 데모등으로 합세를 했다. (民戰에서는 이 투쟁을 '역송환자 탈환 투쟁'이라 명명)이 투쟁중에 탈출자가 속출, 수용소의 경비및 경찰, 지역 소방단원까지 합세, 겨우 진압시킨다. 여기에 동원된 경비, 경찰만도 연인원 6천명이 넘었고 또 최류탄이 동원되기까지 했으며, 12명이 검거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오무라수용소 사건'이란 이름하에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이 이후부터 재일동포 형법위반자들의 한국으로의 송환은 불가능해졌지만, 송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 형기를 마쳐 자유의 몸이 되어야 될 동포들을 다시 수용소에 수감하는, 세계적으로 예를 볼수없는 비인도적 처사를 하게 된다.

결국 형법위반자 동포들은, 형기를 마쳐 교도소를 나서는 문에서, 수용소 경비관이 퇴거강제영장(退去强制令書)를 들이대면서 다시 체포, 수갑을 체워서 오무라 수용소로 이송된 후, 수용소로 이름만 바뀐 교도소에서 형기없는 징역형을 살아야만 했다.

이들을 다시 체포하여 수용소로 보내는 퇴거강제영장(退去强制令書)이란, 형사사건에서 법원에서 발행하는 '체포영장' 이 아니라, 법무성이 행하는 '행정처분'이다. 엄밀히 말하면 '영장'이 아니라 영서(令書)란 단어를 쓰고 있다. 사법부가 발행하는 영장이 아닌, 이런 행정처분의 영장을 가지고 사람을 다시 구속하는 법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도 있는지 모르겠다. 상당히 연구된 시스템을 가지고, 우리 동포들을 못살게 군 것이다.

▲ 오무라 입국관리 센터. ⓒ제주의소리/출처=구글 지도

그럼 어떤 동포들이 형법위반자로 다시 오무라 수용소에 수감이 되었는가? 7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형을 받거나, 내란죄등 일본국의 치안및 국익에 관한 중대한 죄을 범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본처럼 안정된 나라에서 또 한국동포가 내란죄 등의 죄명으로 형사입건된 사람이 있을까 굼궁해진다. 거의가 7년이상의 형을 받아 형기를 완료한 사람들인 것이다.

이 행정처분에 불복한다는 것은 행정소송을 걸어야 된다. 나라를 상대로 한 행정재판인 것으로 나라를 상대로 재판을 건다는 것은, 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더 외국인으로 살고 있는 일본이란 나라에서 이다.

이들은 어려운 행정재판을 벌려서 재판에서 이기거나, 법무대신의 은혜(?)를 받아야 가석방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도 가석방이 아닌 법무대신의 은혜로서 가방면(假放免)이라 부른다. 가방면(假放免)의 원칙은, 본인의 중병, 가족이 중병이어서 본인이 간호를 해야하기 때문, 자비 출국, 이 전부였다. 재판을 벌일 수가 없는 사람은 오로지 법무대신의 은혜만을 기다리고 있어야 되는 것이다.

이들은 형기없는 수용소란 감옥에서 길게는 몇년씩 수용된다(3년이상 수용된 경우도 있었다). 밖에서 가족이나 친지가 변호사를 선임하여 행정재판을 벌일수가 있다면 좋으련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7년이상 옥살이를 하다보면 가족관계도 허물어 진다. 이들은 오무라 수용소에서 밀항자들과 같은 방에 수용되게 된다. 밀항자들은 몇개월 있으면 한국으로 송환되지만, 이들은 계속 남아 수용소 고참이
되는 것이다. 수용자중 이들과 밀항자들과의 비율은, 형법위반자 30% :밀항자 70% 정도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문화에 익숙해 있고, 밀항자들은 대부분이 이제 막 일본에서 잡힌 사람들이다. 문화적인 차도 대단했다. 사이가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싸움의 연속도 있었다. 한국으로 귀국하는 날, 악질적으로 논 형법위반자 동포를 귀국하는 동포들 몇명이서 반쯤 죽게 패버리고 배를 탔다는 경우도 있었다. 특재(特在, 在留特別許可)가 있었다. 특별히 재류허가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밀항자들이 밀항 온 정상을 참작해서 법무대신이 은혜(?)를 주어서 특별히 재류허가를 하고, 석방을 시킨다는 것이다.

 

 

▲ 신재경 교수 ⓒ 제주의소리
 필자 신재경 교수는 1955년 제주시에서 출생했다. 제주북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제일고등학교, 한양공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한일방직 인천공장에서 5년간 엔지니어를 한 후 1985년 일본 국비장학생으로 渡日해 龍谷大學대학원에서 석사·박사과정을 수료했다.  1993년 京都經濟短期大學 전임강사를 거쳐 현재 京都創成大學 經營情報學部 교수로 있다. 전공은 경영정보론이며, 오사까 쯔루하시(鶴橋)에 산다. 오사카 제주도연구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기도 한 신 교수는 재일동포, 그 중에서도 재일제주인들의 삶에 대해 조사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재일동포들의 '밀항'을 밀도 있게 조사하면서 <제주의소리>에 '어떤 밀항이야기'를 연재해 왔다. 또 일본 프로야구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발휘 '신재경의 일본야구'를 써 왔다.    jejudo@nift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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