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성 문화유적100] (47) 의귀리 할망당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할망당 궤 ⓒ양영자

의귀리는 말(馬)의 고장이다. 의귀리의 김만일은 육마(育馬)에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이름을 날렸던 인물이다. 그는 나랏님의 요청을 받아들여 양마 5백 필을 헌상하였는데, 높은 벼슬과 함께 관복 일습을 하사받았다. 이에 마을 이름이 ‘옷귀(衣貴)’, 오늘날의 의귀(衣貴)가 되었다.

당굿에서 구송되는 심방의 사설에 김만일 가문인 김씨 집안의 내력이 구술된다. 김씨 집안에서 행해지는 굿의 형식도 다른 집안과는 차이가 있어서 다른 집안에서는 ‘큰대’를 한 개만 세우는데 김씨 집안에서는 3죽을 세운다고도 한다.

할망당은 마을 동쪽 200m 지점에 과수원을 끼고 위치해 있다. 옛 제단을 그대로 두고 자그마한 당집을 지어 마을 당골들을 기다리고 있다. 당의 제일은 6월 8일, 18일, 28일과 11월 8일, 18일, 28일이다. 당집에 걸린 지전과 소지는 당골의 기반과 방문 정도를 짐작하게 한다.

당집의 입구에 큰 궤가 두 개 있는데 얼핏 보기에도 뭔가 들어앉아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제의가 끝나면 여기에다 잡식한 것을 갖다 놓기도 하고 소지를 불사르기도 한다. 이는 할망당이「토산알당본풀이」를 한다는 점과 일맥 상통한다.

옛날, 나주 고을에 목사가 부임해 오는 족족 백일을 채우지 못하여 봉고파직이 되었다. 양목사가 백일을 채울 것을 장담하고 많은 관속과 육방 하인을 거느리고 나주로 향하였다. 금성산 앞을 지나는데 통인이 막아서며 이 산엔 영기 있는 토지관이 있으므로 하마(下馬)할 것을 권유했으나 뿌리치고 나아가더니 얼마 안 가서 말이 발을 절어서 더 갈 수가 없었다. 올라가 보니 월궁(月宮)의 선녀 같은 아가씨가 머리를 빗고 있어, 환생해 보이기를 청하니 아가씨는 큰 뱀이 되었다.

목사가 포수에게 불 세 방을 놓게 하니, 뱀은 금바둑돌·옥바둑돌로 변하여 서울 종로 네거리에 떨어졌다. 제주의 강씨·오씨·한씨 형방이 미역·전복 등을 진상하러 서울에 갔다가 우연히 이 바둑돌을 줍게 되었는데 전에 없이 진상이 수월하였다. 진상을 끝내고 제주도로 돌아오게 되자 바둑돌을 던져두고 배를 띄우려 하니 이상하게도 바람이 막혀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보자기를 풀어 보니 바둑돌이 들어 있었다.

세 형방은 성산읍 열운이(온평리)로 들어왔는데 포구에 배를 붙이자 바둑돌은 꽃 같은 아가씨로 변신하였다. 그 마을 당신 맹호부인에게 명함을 드렸으나 한 마을에 토지관이 둘이 될 수 없다면서 나가라고 하여 임자 없는 마을을 찾아다니는데, 개로육솟(아래아)도가 아가씨의 팔목을 잡으니 더러운 놈 잡았던 팔목을 그냥 둘 수 없다고 장도칼을 꺼내어서 팔목을 싹싹 깎아두고 토산 메뚜기모(아래아)루에 좌정한다.

의귀리 본향 할망은 마을사람들에게 건강을 가져다주고 액운을 면해준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당할망에게 모든 것을 조심하게 해달라고 빈다.

당골들은 ‘할망이 다 알안 헤 주.’, ‘건구름 탕 뎅이멍 우리를 도웨졈구나.’하고 믿는다. 마을사람들은 건강과 부와 명예가 모두 할망에게서 나온다고 믿고 있으며 늘 경외심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 / 양영자

* 찾아가는 길 - 의귀리 사거리 → 동쪽으로 1.4km 지점 → 오른쪽 오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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