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1) 왜 몽골은 탐라에 주목했을까?

제주와 몽골의 만남은 800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몽골은 제주에 침략세력으로 들어왔으나 이때 남긴 문화적 영향력은 현재에까지도 짙게 남아있습니다. 제주문화예술재단이 몽골의 제주 지배 100년 그리고 그 이후의 문화적 영향을 담은 책 '제주, 몽골을 만나다'를 발간했습니다. 김일우 박사가 쓴 논문을 문소연 구성작가가 편하게 읽히는 문체로 바꿔 엮었습니다. 이 흥미로운 제주와 몽골의 만남을 <제주의소리>를 통해 매주 수요일 연재합니다. 편집자주.

▲ 1200년대 제주 섬 위치도 ⓒ김일우·문소연

고려 원종 8년인 1267년, 제주토착세력의 최고위층인 성주 등이 몽골조정에서 몽골황제를 만납니다. 몽골은 1271년 ‘원元’으로 개칭됐지만 이 책에서는 계속 ‘몽골’이라는 이름을 쓰겠습니다. 당시 몽골황제는 “탐라를 주목했다”는 세조[쿠빌라이:1260~1294]였습니다. 『원사元史』의 기록에는 “백제가 그 나라 신하 양호梁浩를 보내 알현하자 비단을 차등 있게 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탐라지역은 고려시대 초창기부터 고려에 편입되었고, 1229년(고종 16) 이전에 이미 ‘제주’라는 명칭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몽골은 ‘탐라’에 주목했으며, 굳이 ‘백제’의 신하라고 했던 것일까요?

당시 몽골은 북쪽의 러시아와 서쪽의 중앙아시아에 있는 거의 모든 나라를 정복했지만 중국의 남쪽에 있는 남송과 바다 가운데 있는 일본은 정복하지 못한 때였습니다. 탐라는 남송과 일본의 요충이기 때문에 두 나라를 정벌할 때 전초기지로 활용하려는 계산으로 탐라성주를 불러 실정을 미리 파악하고 회유하려는 것이었지요. ‘백제’라는 표현은 탐라를 백제의 영역으로 여김으로써 고려의 연고권을 털어버리려고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2년 뒤인 1269년(원종 10)에 몽골은 탐라주변의 도로를 자세히 살피도록 사신을 파견합니다. 그 목적은 “사람들이 탐라의 바닷길은 남송과 일본에 가기가 매우 쉽다고 말했기 때문”에, 곧 일본과 남송을 정벌하기 위한 전략거점 확보의 사전작업이었던 것이지요.

<관련유적 돌아보기>

해안방어 성담  환해장성

▲ ⓒ김일우·문소연

‘고장성古長城’, ‘장성長城’, ‘해안성담’ 등으로 부르기도 하는 ‘환해장성環海長城’은 말 그대로 해안을 둘러쌓은 성담입니다. ‘환해장성環海長城’이라는 명칭은 『탐라기년耽羅紀年』(김석익, 1918년 편찬)에 처음 등장한 듯합니다. 제주해안을 길게 둘러친 장성이라 해서 ‘제주의 만리장성’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환해장성이 처음 쌓아진 것은 1270년, 고려의 개경정부에서 보낸 관군이 시작했습니다. 당시 진도를 거점으로 삼아 대몽항쟁을 벌이고 있는 삼별초가 제주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그때 주로 쌓여진 것은 지금의 화북마을에 있는 곤을동환해장성과 별도환해장성인 듯합니다. 같은 해 제주로 들어와 고려관군을 물리친 삼별초 역시 환해장성을 계속 쌓았습니다. 이때 환해장성의 용도는 고려군과 몽골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때는 해안선을 따라 연속해 쌓은 것이 아니라 여·몽군이 상륙하기 쉬운 곳을 선택적으로 골라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애월환해장성이 남아있습니다.

▲ 곤을동환해장성 ⓒ김일우·문소연

조선시대 들어서서도 환해장성은 계속 보수되거나 신축되었습니다. 이때는 왜구 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배인 이양선의 출몰이 잦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듯 환해장성은 시대에 따라 경계警戒의 대상을 달리하며 축조됐지만, 그것을 쌓기 위해 동원된 인력은 늘 제주백성들이었습니다. 결국 환해장성은 제주가 겪어야 했던 기구한 역사에 맞물린 도민들의 애환이 서린 유적인 셈이지요.

환해장성은 해안에서 파도에 씻기고 구르며 닳아진 자연석을 크기별로 적당하게 분류해 쌓아놓았습니다. 형태 또한 일정하지 않습니다. 높이, 두께, 경사도 등이 다양합니다. 더불어 해안가 밭 돌담이나 바닷물 범람방지용 돌담 등과 구별이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 아직도 열아홉 개 마을 해안지대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 별도환해장성 ⓒ김일우·문소연

현재 열 곳의 환해장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세 곳이 고려시대부터 쌓아졌다고 보는 환해장성입니다. 

곤을동환해장성은 화북마을 해안에 140m 정도의 길이로 남아있습니다. 높이는 3~4m 정도 됩니다. 적당히 닳아진 현무암들이 불규칙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쌓아진 채 수백 년 세월 저편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합니다.

별도환해장성은 화북마을 해안의 구릉 지형을 이용해 쌓아졌는데, 크고 작은 자연석들이 빼곡하게 성담을 이루고 있습니다. 620m 정도가 남아있고 높이는 2m 조금 높습니다.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어 복원하면서 다듬은 느낌이 강합니다.

▲ 애월환해장성 ⓒ김일우·문소연

애월환해장성은 360m 정도의 길이가 남아있는데, 성의 잔존 높이가 2.5m에서 5m에 이르는 부분도 있습니다. 도내 환해장성 가운데 가장 높은 성담인 셈이지요. 애월환해장성이 고려시대부터 쌓였던 것은 제주에 들어온 삼별초가 근거지로 삼았던 항파두리성이 애월 지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남아있는 애월환해장성은 적잖이 무너져 내리기도 했습니다만, 성담 가장자리를 넓고 높게 잡고 그 안에다 잡석들을 두껍게 채워놓은 환해장성 축성방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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