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추운 겨울의 자화상

  어린 시절, 고향의 겨울도 눈이 많이 내렸었다. 하지만 한기(寒氣)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작년, 그리고 올해의 겨울은 유달리 한기가 크게 다가온다. 몇 십 년만의 추위니, 폭설이니 하는 뉴스는 올 겨울, 남달리 느껴지는 한기가 느낌이 아니라 실재임을 일깨운다.

 추위의 정도를 떠나 겨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시기이다.  TV에서는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의 풍경을 소개하고 있다. 한 할머니가 남이 태우다 만 500원짜리 연탄을 정성스레 등바구니에 지고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탈만큼 타서 재가 되다시피 한 연탄의 한 쪽 귀퉁이가 타지 않고 남았다고, 쓸 만하다며 멋쩍은 웃음을 보이신다. 이 달동네의 겨울은 외풍을 가리기 위한 비닐과 얼어붙은 골목계단, 무덤과 같은 밤풍경으로 묘사됐다.

 며칠 걸러 많은 눈이 내리고 길이 얼어붙기 시작하면서, 가장 곤란함을 겪는 이들은 누구일까 생각해봤다. 하루하루 벌어야 살림을 유지해나갈 수 있는 이들이 우선 떠오른다. 그 중에도 작업장 인부들, 대리운전 기사, 택시 기사들과 같은 이들은 쌓인 눈과 얼어붙은 거리에서 유년시절의 추억 같은 것은 떠올릴 새 없이 연일 이어지는 한파에 노심초사, 원망을 앞세우고 있겠다 싶다. 그들에게 단지 이번 추위로 인한 벌이의 공백이 한 때의 ‘허탕’으로만 끝난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이다. ‘펑크’난 한 철 벌이로 ‘까먹은’ 날들이 밀리고 쌓여 어쩌면 일 년 내내 곤란을 겪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겨울 추위 앞에서 가장 큰 곤란을 겪는 이들은 아무래도 거리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노숙인 들일 것이다. 지난 달, 어느 언론은 서울역에 머무는 100여명의 노숙인들이 새벽거리로 내쫓겨야만 하는 사연을 소개한 바 있다. 유일하게 열차 왕래가 없는 시간대인 새벽 1시 반부터 2시까지 이뤄지는 역사(驛舍) 청소로 그들은 이 겨울 내내 매일같이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새벽 거리에 서야 하는 것이다.
 
 며칠 전 제주도내 일간지에는 추위로 동사(凍死)한 한 노숙인에 관한 이야기가 게재되었다. 어느 과수원 판잣집에서 머물던 한 60대 노숙인이 쓸쓸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이다. 기사와 함께 실린 사진은 그 노숙인이 거처했던 판잣집을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 판잣집이지 아예 엉성한 ‘나무 궤짝’ 정도가 맞아 보인다. 기사를 쓴 기자도 그 노숙인의 거처를 찾는 과정에서 눈앞에 보이는 ‘물건’이 그이가 살던 ‘집’인줄 몰랐다고 쓰고 있다.

 바로 다음날 제주시 부시장은 노숙인 관리에 철저를 기할 것을 주문했다는 소식도 실렸는데, 동시에 나는 몇 년 전, 제주시의 노숙인 실태와 관련해 시 당국과 실랑이를 벌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 시 당국은 제주시에는 노숙인이 ‘단 한명도 없다’고 주장했었다. 법적 기준이 뭐라고, 그 기준에 따르면 ‘부랑자’는 있을지언정 노숙인은 없다는 논리였다. 관련 규정에 따르면 노숙인이란 ‘일정한 주거 없이 상당 기간 거리에서 생활하거나 그에 따라 노숙인의 쉼터에 입소한 사람’ 정도로 정의되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사회적 합의 기준은 없는 듯하다. 하지만 정작 노숙인이 한 명도 없다는 논리에는 법적 기준의 문제보다는,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관광제주의 관문인 제주시에 노숙인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관광지 이미지를 흐린다는 이유 때문에 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만큼 노숙인의 존재 자체는 있어도 모른 척 ‘외면하고 싶은 대상’이다.

 이런 경향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작년 말 도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한 도의원은 “민간단체에서 파악하는 노숙인은 100여명인데, 공식통계는 3명에 불과하다”며 노숙인들의 건강관리가 필요한데 기초적인 통계조차 없다며 이를 지적한 바 있다. 이 보다 앞서 작년 8월에는 제주시가 ‘노숙인 근절을 위한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개최한 바 있는데, 여기에서는 노숙인들의 존재가 시민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며 예방순찰 강화, 관련 피해 예방 대응, 노숙인 지도활동 강화 등을 주로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근절’을 위한 ‘대책회의’ 라는 회의 타이틀만큼이나 ‘순찰’, ‘대응’, ‘지도’ 등이 여전히 행정이 보여줄 수 있는 노숙인들에 대한 유일한 처방임을 드러낸 사례였다. 아직까지도 노숙인은 돌봄이나 재활을 위한 대상이기 보다는 단속하고 지도해야할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다양한 노숙인 재활프로그램을 발굴 추진하고 있다는 제주시 관계자의 언급도 싣고 있었지만, 이번의 노숙인 사망사실만으로도 여전히 근본적인 대책은 오리무중인 셈이다.

 더 이상 노숙인의 죽음이 혹한의 겨울을 표상하는 반복적 사건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사회 노숙인들에 대해 어떤 생각과 태도를 가질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벌어져야 한다. 노숙인이라 이름 지어진 그들이 아이들과 더불어 단란한 한 때를 영위했던 우리와 똑같은 어느 가정의 일원이었음을 상기해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은 한 때, 꿈을 위해 성실히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면서 동시에 이 사회에 헌신했던 사회 구성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노숙인은 대체로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이거나 ‘위험한 정신질환자, 혹은 알코올 중독자’라는 편견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사회의 노숙인들 중 70%는 안정적인 주거나 일자리, 재활프로그램만 제대로 거쳐도 곧바로 가정과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노숙이라는 한계 상황으로 몰린 원인은 무척이나 다양하지만, 가장 주된 원인은 ‘사회적 불평등’이라는 것이 대체적인 지적이고 보면, 명백히 ‘개인의 탓’은 아니다. 우리사회에서 노숙인의 삶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른 것이 1997년 IMF 이후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는 충분히 설명되어지고 있다. 불안정한 고용과 장기실업, 교육비와 생계비 부담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사회보장제도와 주거비 부담 등이 노숙의 가능성을 키우고, 누구든지 예비 노숙인으로 위치 짓게 만드는 사회의 구조, 그것이 노숙인의 다른 이름이다. 노숙인의 존재양식은 한 마디로, 어려운 시대, 험난한 우리사회의 자화상이라 할 만하다.

 노숙인은 어느 사회에서나 인권침해의 표상이 되는 대표적인 소수집단이다. 이들은 최소한의 사회서비스에서도 ‘예외’인 존재들인 셈이다. 존재하되 인정되지 않는 존재, 가난과 사회적 배제, 극단적인 편견의 대상이 바로 노숙인들이다. 이들의 삶이 지금 어떻게 유지되고, 재기의 기회가 얼마나 보장되느냐 하는 것이야말로 ‘좋은 사회’의 지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더 이상 산재한 노숙인들의 삶에 눈감을 것이 아니라, 최소한 그들이 치유 받고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오히려 관광제주, 평화의 섬 제주가 스스로 그려가야 할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올 겨울은 어쩐지 더욱 삭막하게 느껴진다. 예의 그 ‘사랑의 온도계’도 자취를 감추었고, 구세군의 종소리도 그 울림이 커 보이지 않았다. 실제 구세군을 통해 모여진 성금은 작년보다 20%나 줄었다고 한다. 겨울 추위만큼이나 사람들의 마음도 얼어버린걸까? 아니면 갈수록 팍팍해지는 우리네 살림살이 탓인가?

▲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정책위원장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지났다. 국민생활 최저선 확보를 목표로 만들어진 이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인구의 8%, 약 400여만명이 ‘사각지대의 가난’에서 고통을 겪고 있다. 똑같은 가난, 구조적 빈곤에 처했는데도 이런 저런 이유로 최소한의 사회권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이들만 1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더욱 추운 것은 시대의 겨울이다. /고유기 제주참여환경연대 정책위원장 <제주의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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