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3) 삼별초의 부상(浮上)

몽골과의 전쟁은 끝났지만 고려는 또 다른 전쟁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고려정부의 부몽(附蒙)에 반기를 들고 항몽을 내세운 ‘삼별초’가 전면에 등장한 것입니다.  

삼별초는 어떤 조직이었을까요?

1219년(고종 6) 무신집정자가 된 최우가 1230년(고종 17) 경에 야간 치안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를 조직합니다. ‘별초’란 ‘가려 뽑은 부대’라는 뜻입니다. 야별초에 소속한 군사가 많아지자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눕니다. 그리고 몽골과의 전쟁 중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 등으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합니다. 좌별초와 우별초 그리고 신의군이 합해진 것이 바로 ‘삼별초’입니다.

삼별초는 국가의 공적인 군대였지만 동시에 무신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신정권 말기에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삼별초가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주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어찌된 일이었을까요?

▲ 항파두리 항몽유적지 내 항몽순의비 설치지역 전경 ⓒ김일우·문소연

무신정권은 삼별초 가운데서도 특히 야별초의 군사력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야별초는 무신집정자에 직속되어 있었지만 신의군은 달랐습니다. 신의군은 몽골과의 전쟁 중에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설치되었기 때문에 야별초와는 그 기원을 달리하고 있었습니다. 원종에 호응해 마지막 무신집정자를 제거하는데 투입된 주력부대는 바로 신의군이었던 것입니다.

무신정권의 붕괴는 몽골에 부응하는 왕정복고를 의미하는 것이고 동시에 개경 환도로 바로 직결되는 것이었습니다. 1270년(원종 11) 5월 15일 무신정권이 붕괴되자, 5월 23일 개경환도가 결정됩니다. 이는 이미 예견된 경로였습니다. 그런데 6월 1일 삼별초가 다시 반기를 듭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삼별초는 왜 상반된 행동을 하게 된 걸까요?

개경환도를 주도한 왕정에 대한 삼별초의 봉기는 5월 23일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이 봉기를 주도한 것은 야별초였습니다. 이에 대해 원종은 5월 25일에 회유를 시도했고, 5월 29일에는 삼별초의 혁파를 통고합니다. 이 ‘혁파’라는 강경조치가 삼별초군을 극도로 자극했습니다. 그리고 사태의 추이를 관망 중이던 다수의 삼별초군이 태도를 명확히 하는 계기가 됩니다. 봉기는 주로 야별초의 군사력에 의해 이루어졌고 신의군이 이에 부응함으로써 삼별초는 비로소 일체화된 집단으로 결합됩니다. 그래서 6월 1일 왕족 승화후 온을 새로운 왕으로 삼고 고려의 개경정부에 반기를 들게 된 것입니다.

이후 삼별초가 근거지로 삼을 지역으로 꼽았던 곳 역시 제주였습니다. 항몽을 내세워 남하할 때 제주와 진도를 저울질하다가 진도를 먼저 택했고, 진도가 함락되자 결국 제주에 들어옴으로써 제주와 몽골이 만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 제주항파두리 항몽유적지 ⓒ김일우·문소연

<관련 유적 돌아보기>

삼별초의 마지막 보루
제주항파두리 항몽유적지

1271년(원종 12),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인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와 항몽의 최고 주요 거점으로 자리 잡은 곳이 바로 항파두리성입니다. 

성이 자리한 마을 이름인 ‘고성리’도 항파두리성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성 이름 ‘항파두’의 기원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그 중 성의 지형에서 연유한 이름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항[항아리]의 가장자리와 같이 타원형으로 쌓아져 있기 때문에 이름 붙었다는 것이지요. 그런가하면 제주삼별초를 진압한 장군 이름인 ‘홍다구’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당시 몽골은 큰 공을 세운 장군에게 ‘큰 용사’라는 뜻인 ‘바투’ 호칭을 주었다고 합니다. 홍다구가 그 바투 칭호를 받게 되었고, 항파두리성은 ‘홍바투’의 전공을 기리는 ‘홍바투성’을 뜻한다는 겁니다.

어쨌거나 항파두리성이 자리한 곳은 해안에서 조금 올라간 지역으로 바다가 눈앞에 보이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가파른 입지에 동서로 낀 깊은 계곡으로 천연적인 요새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풍부한 음용수와 양질의 토양 등 성 축조와 기능에 적합한 조건들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제주는 화산섬이어서 진득한 흙을 구하기 어려운데 항파두리성 일대에는 기와를 구워낼 만큼 질 좋은 진흙들이 있었습니다. 한라산에서 나무들을 잘라다 건축 자재로 이용할 수 있었고, 멧돼지며 사슴, 노루 등의 산짐승들을 사냥할 수 있었습니다. 가까운 해변에는 크고 작은 포구들이 형성돼 있어 군사용으로 쉽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당시 제주도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들과도 가까워 필요한 물자를 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 복원된 항파두리 토성 ⓒ김일우·문소연

항파두리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으로 쌓여졌습니다. 동서남북에는 성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이가 대략 6㎞였을 외성은 흙으로 만들어진 토성인데, 토층과 석괴층을 교대해가며 10여 층으로 쌓은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내성은 외성 안 중심부에 돌로 쌓은 둘레 750m의 정사각형 석성으로 알려져 왔었습니다. 그런데 2010년 10월 새롭게 시굴조사를 벌인 결과 석성이 아니라 토성이었을 가능성이 제시되었습니다. 발굴단에 따르면 내성은 점질토와 사질토를 자갈과 교대로 섞어 쌓았다는군요. 하부 폭은 최소 4m 쯤 되고, 전체 연장길이는 760m에 이르는 사각 형태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삼별초는 제주에 들어온 뒤 1년여 동안 이 항파두리성을 비롯한 방어시설구축에 주력했습니다. 당연히 일손이 모자랐을 터, 인근주민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고초를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통정 장군이 토성을 쌓을 때는 매우 흉년이었는데, 역군들이 배가 고파 쭈그려 앉아 똥을 싸고 그것을 먹으려고 돌아앉아보면 이미 옆에 있던 역군이 주워 먹어버려 자기가 싼 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는 내용의 전설이 전해져, 항파두리성 구축에 동원된 제주백성들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는지를 짐작케 합니다.

항파두리성은 자연적 지형을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성의 동쪽은 고성천, 서쪽은 소왕천이라는 하천이 깊은 계곡을 형성하고 있어 외성인 토축만으로도 대단히 견고한 요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외성은 말을 타고 달릴 수 있는 고속 군사도로로 활용될 정도의 규모였다고 합니다. 이는 “김통정 장군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받되 돈이나 쌀을 받지 않고, 반드시 재 닷 되와 빗자루 하나씩을 받아들여 비축해 두었다. 그리고 토성 위에 빙 돌아가며 재를 뿌린 다음 말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달리게 해 재가 안개처럼 사방을 뒤덮게 함으로써 백성들 사이에 자신이 구름 위를 난다는 이야기가 돌도록 했다”는 전설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건물이 있었던 성 안에서는 당초(唐草) 무늬가 새겨져 있는 헌평와(軒平瓦) 및 ‘고내촌(高內村)…신축이월(辛丑二月)…’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 파편, 청자 파편, 불상 등이 확인되어 유적의 중요성을 입증해주고 있습니다. 내성과 외성 외에도 항파두리성 북측의 구시물과 옹성물 같은 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외성 밖으로 보조성을 구축했었다고 합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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