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 장군의 호령 소리 들려온다
최영 장군의 호령 소리 들려온다
  • 양영자 (-)
  • 승인 2011.02.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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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여성 문화유적100] (54) 대륜동 법환리 막숙물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제주여성과 그들의 삶이 젖어있는 문화적 발자취를 엮은 이야기로, 2009년말 ‘제주발전연구원’에서 펴냈습니다.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은 2008년에 이미 발간된 『제주여성 문화유적』을 통해 미리 전개된 전수조사를 바탕으로 필진들이 수차례 발품을 팔며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노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 제주가 있도록 한 ‘우리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제주의소리>는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의 협조로 『제주여성 문화유적 100』을 인터넷 연재합니다. 제주발전연구원과 필진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 제주의소리

▲ 막숙물 ⓒ양영자

양지모(아래아)루 동산에 올라 마을을 굽어보면 마치 새가 알을 품고 있는 아늑한 형상을 하고 있다. 보자기를 활활 풀어 마을과 범섬, 그 사이에서 물질하는 잠(아래아)수들까지 송두리째 퍼담아 야반도주하고 싶을 정도로 탐나는 풍경이다.

마을 앞에 떡 버티고 있는 범섬은 호랑이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마치 선비가 책상을 받아 앉은 형세여서 큰 인물이 나는 고장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범섬의 미덕은 수려한 인재를 내는 것 못지않게 마을사람들의 생업과 안녕을 위해 헌신하는 데 있다.

범섬은 세찬 물소리와 태풍을 막아주고 우환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의 선물이다. 범섬을 오가며 잠(아래아)수들은 물질을 하고, 그 바닷물을 매개로 김치통, 멜통, 소금통, 넙으물원, 남매원 등을 만들어 생활을 영위했다.

고려시대 때 원(元)나라는 탐라를 근거지로 항쟁을 벌였던 삼별초군을 진압한 후, 목마장(牧馬場)을 설치하여 몽골인 목자로 하여금 말을 기르게 하면서 오랫동안 탐라를 지배했다. 1294년에 탐라를 되돌려 받은 고려는 탐라를 제주로 고치고 목사(牧使)를 파견하여 다스렸지만 공마(貢馬)는 계속 바쳐야 했다.

그 뒤 원·명이 교체되면서 1370년(공민왕 19)에 고려와 명나라가 국교를 맺게 되자, 제주에서 산출되는 말을 명나라로 보내게 되었다. 이때 제주의 목호 석질리(石迭里)·필사초고(必思肖古)·독불화(禿不花)·관음보(觀音保)등은 명나라에 말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고 목호의 난을 일으켰다.

1374년 명나라가 제주의 말 2,000필을 요구해 오자 제주의 목호들이 공출을 거부하고 300필만 내놓았다. 공민왕은 할 수 없이 최영(崔瑩)을 파견하여 목호를 토벌하게 된다. 최영 장군의 추격에 밀린 목호들은 범섬으로 후퇴하여 웅거하고 항전하다가 10여 일만에 평정되었다.

범섬은 목호들의 최후의 격전장이 되었는데, 이 마을에는 최영 장군의 목호 토벌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남아 있다. 최영 장군이 진을 치고 숙영(宿營) 하였던 막숙(幕宿), 성을 쌓았던 군자왓(軍城), 활쏘기를 연마했던 사장앞(射場)앞, 병기를 만들었던 병듸왓, 범섬을 공격하기 위해 나무로 배를 엮어 이었던
배염줄이, 군사를 조련시켰던 오다리 등이다.

막숙물은 사시사철 용천수가 시원스럽게 흐르는 법환마을 사람들의 젖줄이며 명소이다. 마을사람들의 90% 이상이 이 물을 허벅으로 져다 먹으며 살아왔다. 바닷물이 들어버리면 먹지 못하고, 파도가 치거나 놀이 크게 불어도 먹지 못했지만 ‘웃통’ 만큼은 늘 물이 솟아나 안전하게 500대촌을 먹여 살렸다. 그 일은 1977년까지 계속되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다 보니 자연히 정보 제공터의 역할도 하였다. 어느 집에 혼사가 있고 기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등의 소식이 모두 여기서 흘러 나왔다.

특히, 집안의 대소사가 있을 때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가 물을 길어 오는 어려움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막숙물을 길어다 주는 것이 큰 부조였다. 물 한 허벅은 20kg인데, 오르막길의 경사도가 15℃여서 연약한 여자들은 물 한 허벅을 지기가 힘들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물에 엄격한 경계가 있다는 점이다. 두 군데로 나뉘어 동동네 사람들이 먹는 물은 동카름물, 섯동네 사람들이 먹는 물은 서카름물이라 했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고운 수질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맨 위에서부터 먹는 곳, 채소 씻는 곳, 빨래하는 곳이 확연히 구별되어 있었다. 지금도 30~40여 명이 사용하고 있고, 낮에는 아이들의 물맞이 놀이터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 양영자

* 찾아가는 길 - 법환 마을회관 → 바다 쪽 1km 막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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