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삼별초, 제주를 장악하다

▲ 삼별초 이동경로 ⓒ김일우·문소연

1270년(원종 11) 9월, 제주에는 고려 개경정부가 보낸 관군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진도를 항전 거점으로 삼고 남해의 섬들과 연안 지역을 장악한 삼별초가 제주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제주 방어군은 김수의 200명 관군과 현지민 그리고 삼별초의 위협이 높아지자 추가로 파병된 고여림의 군사 등 1천여 병력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삼별초가 별도포로 들어올 것이라 예상하고 주변에 방어시설인 성을 쌓고 있었습니다. 그 성이 제주해안을 두른 환해장성의 시작이었습니다.

1270년 11월 3일 진도삼별초는 이문경 부대를 보내 제주점령에 나섭니다. 그러나 개경정부  관군의 예상과 달리 서쪽의 명월포로 들어온 뒤 동쪽으로 나아가 동제원에 주둔합니다. 그리고 관군을 역습해 송담천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입니다. 이 싸움으로 관군은 전몰하고 삼별초는 조천포에 웅거합니다. 

1271년 5월 진도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게 함락됩니다. 삼별초의 상징적인 왕이었던 승화후 온은 이때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지요.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제주로 들어왔고 남해도에 있던 유존혁도 80척의 선단을 이끌고 들어와 합류합니다. 이렇게 해서 제주를 새로운 발판으로 삼은 삼별초는 항전활동을 재정비하게 됩니다.

제주에 들어온 삼별초가 먼저 주력했던 일은 방어시설을 구축하는 것이었습니다. 환해장성을 쌓고 내성과 외성의 이중으로 된 항파두리성을 쌓고, 항파두리성과 가까운 포구이자 삼별초 수군의 거점이었던 애월포에 애월목성을 쌓았습니다. 나무로 쌓은 성이었던 애월목성은 조선 초기까지 절반쯤의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 환해장성(화북) ⓒ김일우·문소연

1년여 동안 방어시설 구축에 주력한 제주삼별초는 1272년(원종 13) 3월부터 전라도 연해 지역을 대상으로 군사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점차 활동 범위를 넓힙니다. 충청도와 경기도 서해 연안에 이르러 개경을 위협하며 지방 관아 등을 적극적으로 공략해 나아갔는가 하면, 몽골군의 주둔지였던 경상도 연안에까지 활동영역을 확대시키는 대담성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주 삼별초군은 그렇게 본토의 여러 지역을 위협하며 개경의 고려정부를 긴장시켰습니다. 그러나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제주를 거점으로 하고 있다는 한계성 때문에 산발적인 공격을 할 수밖에 없어 진도 거점 시기에 비해 그 기세가 많이 약화된 상태였습니다.

제주삼별초의 군사 활동이 활발해지자 개경정부와 몽골은 사신과 김통정의 조카 등을 보내 회유하려 했지만, 제주삼별초는 강력하게 거부했습니다. 

개경정부는 몽골에게 삼별초 토벌을 거듭 요청했고, 몽골도 일본 정복에 앞선 정지작업으로 탐라 평정을 결정하게 됩니다.

『원사』에 몽골의 결정을 기록한 부분을 보자면, ‘입조(入朝)'여부가 불투명한 일본보다는 탐라를 먼저 평정하는 것이 순서에 맞고, 일찍 입조했던 탐라국 왕이 지금 역적들에게 축출되었으니 군사를 일으켜 토벌함이 의리상 앞서 행해야 할 일’이라는 의미를 담은 내용이 나옵니다. 당시 제주에 대한 몽골의 생각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지요.

<관련 유적 둘러보기>

항파두리성 내외 유적

▲ 돌쩌귀 ⓒ김일우·문소연

돌쩌귀

내성 ‘대궐터’의 순의문 앞 광장에 ‘돌쩌귀’라는 석제유물들이 있습니다. 원래는 항파두리성 안팎에 산재돼 있었던 것을 이곳에 모아놓고 울타리를 쳐놓았습니다. 모두 현무암으로 거칠지만 다듬질이 되어 있습니다. 원형으로 오목하게 파여 있는 홈들이 눈에 띄는데, 문을 끼워 받쳤던 구멍이라고 합니다.

▲ 기와 가마터 ⓒ김일우·문소연

기와 가마터

유적지 주변에 기와를 굽던 가마의 흔적이 두 곳 있습니다. 성 밖 서북쪽 200m 지점에 있는 것은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자연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축조됐습니다. 흙에 많이 묻혀있어서 원형을 알 수 없지만 뒤로 가면서 넓게 퍼져있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항파두리성 동남쪽 ‘장털’이라는 곳에 있는 가마 역시 자연경사를 그대로 이용해 축조됐는데 지형은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습니다. 이 가마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가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와들은 항파두리성 내외 건물에 주로 사용되었으며 성의 담 줄기에도 일부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 장털연못지 ⓒ김일우·문소연

장털

이곳은 항파두리성 본성 안에서 지대가 가장 낮은 곳으로 연못이 형성되었던 지역입니다. 이곳에서 2개소의 건물지구역과 1개소의 기와가마터가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동북부 쪽 성내의 물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게 되어 있는데,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크기는 9,000㎡가 훨씬 넘습니다. 이곳의 흙을 퍼 건물을 짓거나 기와를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연못을 만들어 김통정 등 삼별초 지휘부가 배를 띄우며 즐기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지금은 밭과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고, 남쪽과 북쪽에 물이 흘렀던 작은 골짜기가 있습니다.

▲ 옹성물 ⓒ김일우·문소연

옹성물

항파두리성 북쪽 ‘극락사’라는 사찰 안에 있는 샘물로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물줄기가 가늘지만 예전에는 세차게 솟아 흘렀다고 합니다. 삼별초군이 주둔할 때는 김통정 장군과 귀족들만 이 물을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삼별초군이 패배한 후에도 근처의 마을 사람들은 제사나 굿 등 집안에 정성을 드려야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 물을 이용했다고 전해집니다. 오성물[五生水]라고도 하는 것으로 보아 옹성甕城과는 관련이 없는데, 항파두리성과 관련시켜 물이 옹성 안에 있다고 해서 ‘옹성물’이라 잘못 알려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두 개의 물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돌담울타리를 둘러놓는 등 잘 정비되어 있습니다.

▲ 구시물 ⓒ김일우·문소연

구시물

옹성물 동쪽 길가에 있는 샘물입니다. 삼별초군이 항파두리성을 축조할 때부터 식수 등 생활용수로 사용했던 물이라고 합니다. ‘구시’란 나무나 돌로 만든 ‘구유’를 일컫는 말입니다. 샘물이 솟는 곳에서 2.5m 가량 내려간 지점에 삼별초군이 시설한 대형 목조구유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확인된 목재구유는 사각의 테두리 각목과 곽 내부였는데 4개의 널판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바닥 널판의 면적은 470×265㎝였다고 합니다. 목재판의 밑은 널판 중앙부분에 각목이 놓여 있었고 20㎝ 가량의 황색점토를 다져놓은 것으로 보아 고정된 유구였다는군요. 1993년 2월에 물통 북쪽에서 두터운 나무판자들이 발견되었는데, 삼별초군이 물을 지키기 위해 설치했던 막사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삼별초가 이 물을 얼마나 중요하게 관리하고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이지요.

▲ 구시물 지역 목재구유통의 노출상태 ⓒ김일우·문소연

구시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았으며 물맛이 좋아 상수도가 보급된 뒤에도 마을사람들의 식수로 이용되었습니다. 1928년 큰 가뭄으로 식수난을 겪었을 때 주변의 유수암, 광령, 장정 등지에서도 이 물을 길어다 먹었다고 합니다. 한때는 마을청년들이 물 배급을 할 정도로 물을 길러오는 사람들이 많았다는군요. 지금은 부분적으로 시멘트로 정비돼 있고 정주석 모양의 출입구가 만들어져 있으며 울타리도 둘러져 있습니다.

▲ 장수물 ⓒ김일우·문소연

장수물

항파두리성 북서쪽 밖의 건천 ‘골그미내’가에 있는 샘물입니다. 물의 양은 적지만 바위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옵니다. 바위에 패인 자국이 영락없는 큰 발자국 모양입니다. 김통정 장군이 관군에 쫓기다 성 밖으로 뛰어내릴 때 찍힌 뒤 샘물이 솟았다고도 하고, 관군과 싸우다 진 김통정 장군이 죽어가면서 “내 백성일랑 물이나 먹고 살아라.” 하며 홰를 신은 발로 바위를 꽝 찍었는데 바위에 홰 발자국이 움푹 파이고 거기에서 금방 샘물이 솟아 흘렀다고도 하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원래는 ‘횃부리’ 또는 ‘횃자국물’이라 불렀는데, 이제는 ‘장수물’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 극락오름망대 상상도 ⓒ김일우·문소연

극락오름과 ‘살 맞은 돌’

항파두리성 남쪽 지경에 있는 ‘극락오름’은 삼별초가 무술연마장과 망대로 활용하던 오름입니다. 해발 표고 314m의 오름으로, 정상은 동봉과 서봉으로 나뉩니다. 동봉은 산봉우리가 널찍하고 편평해서 군사들이 머물기에 편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 전망대와 활터가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지금은 잡목과 잡풀이 우거져 있습니다. 전술에 능한 삼별초군은 본성을 지키기 위해 극랑오름 진지에 소수부대를 주둔시켰습니다. 극락오름은 성 밖 남부 지역의 전초기지 역할을 한 것이지요.

▲ 살 맞은 돌 ⓒ김일우·문소연

오름 북쪽에 일찍부터 ‘살 맞은 돌’이라고 불렀던 바위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화살 맞은 돌’을 일컫는 것인데요. 손바닥만 한 자국이 있습니다. 동봉 활터에서 화살을 쏘는 과녁으로 삼았다는군요. 1950년대까지 삼별초군이 쏘았다는 화살이 박혀 있었던 것을 본 마을사람들이 있다는 얘기가 전해집니다.

진군마를

진군마를은 애월읍 고성마을 주거 밀집 동쪽 지역에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나지막한 구릉 지역입니다. 삼별초군들이 진을 쳤던 곳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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