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마지막 항몽세력이 스러지다

▲ 애월환해장성 ⓒ김일우·문소연

1273년(원종 14) 4월, 고려 개경정부의 김방경과 몽골의 홍다구 등이 병선 160척과 여·몽연합군 1만2천 명을 이끌고 제주바다로 들어섭니다. 이들은 중군, 좌군, 우군 등 3군으로 공격진용을 편성했고, 세 지점에서 공격을 진행했습니다. 

지휘부가 있는 주력군이었던 중군은 항파두리성에서 동쪽으로 멀리 떨어진 함덕포로 들어왔습니다. 중군이 외곽지역인 함덕포를 상륙지점으로 택한 것은 삼별초 지휘부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공격군을 일단 외호하면서 제주를 전체적으로 제압함으로써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을 쉽게 하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좌군의 30척 병력은 항파두리성에서 서쪽으로 약간 떨어진 비양도를 교두보로 한림 해변으로 들어옵니다. 우군은 애월 쪽으로 들어올 것처럼 하며 항파두리성의 방어 병력을 애월포로 유인했습니다. 이처럼 ‘적을 속이기 위하여 주된 공격 방향과는 다른 쪽에서 공격하는 ‘양동(陽動)작전’은 이미 진도삼별초를 공격할 때 크게 효과를 보았던 작전이기도 했습니다.

▲ ⓒ김일우·문소연

여·몽연합군의 우군이 애월포로 상륙할 것처럼 하면서 항파두리성의 방어군을 애월 쪽으로 끌어내는 사이에 삼별초군 지휘부를 공격해 들어간 것은 비양도로 들어온 좌군이었습니다. 『고려사』는 당시의 상황을 “좌군의 전함 30척이 비양도로부터 적[삼별초군]의 거점을 직공해 들어가니 적[삼별초군]들이 바람에 날리듯 자성(子城)으로 밀려들어갔다. 관군이 외성을 넘어 들어가 화시(火矢) 4발을 쏘니 화염이 충천하여 적[삼별초군]의 무리가 크게 혼란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삼별초군은 좌군의 공격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말았던 것입니다.

제주삼별초의 활동반경 등으로 미루어 삼별초가 여·몽군의 대대적인 공세 정보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제주삼별초는 나름대로 여·몽군의 공세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사』는 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풍랑이 멎으므로 중군은 함덕포로 들어갔다. 이에 적[삼별초군]들이 암석 사이에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소리치며 뛰어나와 이들을 막았다. 김방경이 모든 배를 함께 나가도록 재촉하니 대정隊正 고세화高世和가 먼저 몸을 던져 적진[삼별초군]에 뛰어들었고 사졸들도 기세를 타고 다투어 나아갔다. 장군 나유羅裕가 정예군을 이끌고 뒤따라 이르러 (삼별초군을) 죽이고 잡음이 매우 많았다.”

▲ 여몽연합군의 제주상륙 ⓒ김일우·문소연

중군이 함덕포에 접근한 시간은 새벽이었습니다. 그리고 함덕포는 항파두리성과 비교적 멀리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삼별초군이 해안에 매복해 중군의 상륙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삼별초는 여·몽의 공세에 대비해 해안의 북안에 광범위하게 군사를 배치해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방경 등이 지휘하는 중군은 삼별초군의 방어에 부딪치기는 했지만 월등히 우세한 군사력으로 이를 곧 돌파하고 항파두리성으로 향합니다.

항파두리성이 함락되기 직전, 삼별초 지휘부는 둘로 갈립니다.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70여 명은 성을 탈출해 한라산으로 숨고, 일부는 여·몽연합군에게 항복합니다. 이렇게 해서 여·몽연합군은 개경에서 출발한 지 20일 만에 항파두리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성안으로 진입한 여·몽군은 삼별초의 지휘부를 붙잡아 6명을 공개처형하고 35명은 포로로 하는 한편 항복한 삼별초의 사졸 1,300명을 포로로 붙잡아 귀환시켰습니다. 지휘부의 35명은 귀환 도중 나주에서 참수했습니다. 한라산으로 들어간 김통정은 목매어 자결하고, 그를 따르던 70여 명도 모두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이로써 3여 년 동안 이어진 제주삼별초의 항몽활동은 종식되고 제주는 몽골이 직접 관리하는 직할령이 되고 맙니다.

<관련유적 둘러보기>

▲ 삼별초 관련 포구와 오름 유적 분포도 ⓒ김일우·문소연

망이리동산

항파두리성의 서쪽과 고성천 사이에 자리 잡은 동산입니다. 북쪽의 넓은 지대를 관찰하기 좋은 곳으로 삼별초군이 망대를 설치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굼지오름

▲ 바굼지 오름(파군봉) ⓒ김일우·문소연

바굼지오름은 애월읍 하귀리 지역에 있는 해발 85m의 오름입니다. ‘바굼지’는 바구니를 일컫는 제주토박이 말입니다. 오름 모양이 바구니를 닮아 바굼지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요. 바굼지오름은 항파두리성과 군항포 사이의 길목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군항포는 삼별초군이 물자를 들여오는 포구로 자주 이용했던 포구입니다. 더불어 바굼지오름은 삼별초군의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습니다. 항파두리성에서 불과 2㎞ 남짓 떨어진 전초기지였지요. 여·몽연합군이 이곳에서 삼별초군을 크게 격파했다고 해서 파군봉破軍峯이라고도 부릅니다.

붉은오름

▲ 붉은오름 ⓒ김일우·문소연

한라산 서쪽 해발 1,061m에 있는 비고 130m 정도의 오름으로 항파두리로부터 남동쪽으로 직선거리 10㎞ 정도에 있습니다. 1273년 여·몽연합군이 항파두리성을 포위해 총공세를 가하자, 성을 탈출한 김통정 장군이 이 오름에 와서 아내와 자식을 베고, 함께 탈출한 70여 명의 부하들과 함께 포진하며 최후의 항전을 펼치다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기록에는 김통정이 그해 윤 6월에 산중에서 목매어 자결한 시체로 발견됐다고 합니다. 그 산중이 이 붉은오름을 말하는 것인지 더 깊은 한라산 속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구전으로는 붉은오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름의 유래로 오름의 토질이 붉은 빛인데서 비롯됐다고도 하는데, 그보다는 김통정이 가족을 베고 싸우던 혈전으로 흙빛이 붉게 물들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군항포(軍港浦)

▲ 군항포 ⓒ김일우·문소연

항파두리성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애월읍 동귀리 해안의 포구입니다. 김통정이 거느린 삼별초가 이곳으로 제주에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후에도 삼별초군이 군수물자를 실어 나르는데 계속 이용했기 때문에 군항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포구 주변 해안에는 종지여, 진여, 번들여, 도린여 등 대여섯 개의 ‘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여’는 바닷가 바닥이 얕거나 썰물 때 드러나는 암석 지형물을 일컫는 제주토박이말입니다. 이곳의 여들은 대부분 썰물 때 뭍과 연결되는데요, 김통정이 이 일대를 군선으로 위장해 여·몽연합군과 항전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조공포(朝貢浦)

▲ 조공포 ⓒ김일우·문소연

지금의 제주시 외도동 해안에 있는 포구로 ‘도근포’ 혹은 ‘외도포’라고도 일컬어집니다. 삼별초군이 물자운반용 포구로 이용했으며, 남해 다도해 주변으로부터 세금을 받았던 포구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삼별초군이 이 포구로부터 애월읍 광령3리를 거쳐 항파두리성까지 이어지는 운반로를 닦았다고 합니다.

애월포

애월읍 애월리 해안에 있는 애월포는 동쪽의 조천포와 더불어 고려 때 전라 남해안 지역에서 탐라로 오는 배가 가장 많이 들어오던 포구였습니다. 삼별초가 입도해서는 수군의 거점으로 삼았습니다. 삼별초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여·몽연합군의 우군이 이 포구로 상륙할 것처럼 하며 항파두리성의 방어병력을 유인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비양도와 명월포

▲ 비양도(항공촬영) ⓒ김일우·문소연

한림읍 앞바다에 떠있는 비양도는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입니다. 『고려사절요』에 목종 5년(1002) 5월에 화산이 분출했다는 기록이 있어 ‘천년의 섬’으로 부르지만 그때 바다 속에서 일어난 화산폭발로 형성된 섬은 아니라고 합니다. 제주본섬에 있는 오름들이 생겨날 때 형성됐고 본섬과 연결돼 있다가 7,500~8,000년 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요.

1273년 삼별초를 정벌하기 위해 출동한 여·몽연합군은 양동작전을 펼치게 되는데, 30척 병력의 좌군이 이 섬을 교두보로 삼고 명월포로 상륙하게 됩니다.

명월포는 지금의 한림읍 옹포리 해안에 있는 포구입니다. 1270년, 진도삼별초의 이문경 부대도 이 포구를 통해 제주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1273년에 여·몽연합군의 좌군을 저지하지 못한 채 항파두리성으로 퇴각하면서 혈전을 벌이게 되지요. 포구 주변에 당시의 상황을 연상케 하는 ‘방어왓’, ‘사장터’ 등의 지명이 남아있습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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