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몽골을 만나다] 몽골과의 100년, 제주의 변화

▲ 제주의 초지벌판(항공촬영) ⓒ김일우·문소연

1273년(원종 14) 4월, 마지막 항몽세력인 제주삼별초가 평정됐습니다. 몽골은 두 달 뒤인 6월에 관부를 설치합니다. 제주를 직할령으로 만든 것이지요. 당시 몽골의 직할령이 된 지역은 제주 말고도 화주[함남 영흥], 서경[평남 평양]이 더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배 방식이 달랐습니다. 화주와 서경은 그곳의 토착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했지만 탐라는 몽골이 관부를 설치하고 관인을 파견해 직접 지배한 것입니다.

당시 몽골이 제주에 설치한 관부는 ‘탐라국초토사(耽羅國招討司)’였습니다. 고려가 이미 사용하던 ‘제주’ 칭호를 버리고 ‘탐라’ 칭호를 붙인 것이지요. 나중에 개편 설치한 탐라총관부 등의 4개 관부에도 줄곧 그랬습니다. 제주가 고려 영역에 속하기 이전부터 쓰인 전통적 호칭인 ‘탐라’를 사용함으로써 고려의 연고권을 불식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직할령으로 삼자마자 몽골은 삼별초에 동조했던 일부 탐라민을 육지부로 옮깁니다. 탐라 지배에 미칠 수 있는 불안요소를 미리 제거하기 위해서였지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조처로 탐라백성 1만223명에게 곡식을 지급하도록 고려에게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몽골은 이미 탐라의 인구를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몽골이 이렇게 지배기반의 기초를 신속히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경영계획을 미리 세워놓았기 때문입니다. 진즉부터 탐라에 눈독을 들이고 항구적으로 지배할 뜻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탐라가 일본과 남송을 잇는 바닷길의 요충지라는 지리적인 가치는 물론이고 천연의 방목지가 깔려있고 전통적으로 배 건조용 목재가 풍부하게 산출되는 지역으로서의 가치도 알아보고 탐을 냈던 것이지요.

탐라를 직할령으로 삼은 이후 몽골은 장기적으로 군마 등을 가져가기 위해 몽골말 160마리를 가져와 지금의 성산읍 수산리 일대인 수산평에 방목했습니다. 제2차 일본정벌을 준비할 때는 배 3,000척 건조분량의 목재를 탐라에서 보급케 했습니다. 그 목재를 벌목하느라 당시 한라산은 헐벗을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런가하면 탐라에서 거둔 물자 등을 본국이나 본국이 뜻하는 장소로 빠르게 나르고 제공하기 위해 나주와 해남 방면에 역참(驛站)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몽골은 탐라를 일본과 남송 정벌의 전초기지로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병참기지로도 경영했던 것입니다.

몽골은 1279년(충렬왕 5)에 남송정벌은 마쳤지만, 일본정벌은 두 차례 실패하고 나서 추진과 중지를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이 시기에 육지부 백성들도 상당한 곤욕을 치렀지만 탐라백성들은 더 심했습니다. 몽골이 삼별초를 무력평정하고 나서 얻은 정복지로 탐라를 간주해 탐라백성을 마치 집단포로처럼 동원해 혹사시켰기 때문입니다.

몽골의 일본정벌이 실패하고, 이에 집착하던 황제 쿠빌라이가 사망하자 고려가 몽골에 요청해 탐라가 고려에 환속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 고려는 탐라를 다시 ‘제주’로 부르면서 행정단위를 승격해 ‘제주목’으로 삼았지만 얼마 뒤 제주는 다시 몽골에 귀속됐습니다. 그로부터 80여 년 동안 제주는 고려와 몽골을 수차례 오가며 귀속됩니다. 그러나 제주로서는 설치된 지배기구의 관할권 소재가 고려에 있느냐 몽골에 있느냐 하는 현상적인 변화였을 뿐이었습니다. 1267년(원종 8) 제주와 몽골의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의 직할령이 된 다음, 제주는 100여 년 동안 이중으로 귀속된 채 몽골의 영향력을 받는 상태에 놓여있었던 것입니다. 그 100여 년 동안 제주사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됩니다.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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