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5)]제6대 제주도지사 최승만①

1951년 '1.4 후퇴'후에 피난민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이들에 대한 구호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사회부 제주분실장 최승만(崔承萬)에 대한 제주도지사 기용설은 전임 김충희 지사의 경질 문제와 함께 거론됐다.

그 소문은 1951년 7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정부는 제주지역에 대한 현지주민과 피난민에 대한 구호업무를 놓고 제주도와 사회부 제주분실로 이원화됨으로써 사업집행에 많은 문제점들이 나타나자 피난민 구호사업을 제주도청으로 일원화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최 분실장을 제주도지사 기용을 은밀히 검토하고 있었다.

최 분실장이 제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50년 12월27일 한국보육원 고문으로서 제주에 피난 오면서였다. 그러나 최 분실장은 고아원 내부문제로 고문직을 한달 만에 그만둔 직후인 1951년 1월하순 제주에 내려왔던 사회부장관 허정(許政)에 의해 사회부 분실장으로 임명됐다.

연희대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의 교수 재직 중에 우여곡절 끝에 제주에 피난 온 최승만은 허 장관이 지사관사에 머물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듣고 관사를 찾았었다. 두 사람은 최승만의 미국 유학시절 때부터 알고 있는 사이였으며, 그후에도 연희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에도 동창인 이기붕(李起鵬) 서울시장과 함께 가끔 어울렸던 관계였다.

허 장관은 최승만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 동안 피난민 구호업무의 책임을 맡아줄 사람이 없어 무척 걱정했는데 최 교수가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허 장관은 오래 전부터 최승만의 검소한 생활태도와 청렴한 성품을 잘 알고 있어서, 그가 아니면 어려운 구호사업의 책임을 맡을 사람이 없다는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연희대 교수에서 사회부 분실장으로

이에 대해 최승만은 "사회부에서 이미 직원 5~6명을 파견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제가 그 사업을 맡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다. 허 장관은 "당신 이외에는 적임자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즉석에서 사회부 고문으로 발령하겠다고 제의했다.

두 사람은 다음날 저녁 지사관사에서 다시 만났다. 허 장관은 "고문직은 책임석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책임 있는 자리가 좋을 것 같다"면서 최승만에게 맞는 직함을 생각했다. 허 장관은 이런 저런 직함을 붙여보다가 결국 사회부 제주분실장이라는 직책이 가장 마땅하다며 그때부터 최승만을 사회부 제주분실장으로 임명했다.

최승만은 분실장의 수락조건으로서 구호사업에 관해서는 도지사라도 자신의 감독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하자 허 장관은 그 자리에서 승낙했다.

사회부 제주분실은 제주시내 남국민학교의 교실을 빌어 개설됐다. 사회부 분실은 피난민구호업무는 물론 피난민대회 개최와 피난민협회 조직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구호물자의 보관과 관리, 배급업무는 제주도가, 이의 감독은 사회부 제주분실이 맡는 이원구조 때문에 두 기관의 갈등이 심했다.

제주도의 입장에서는 4.3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도민들의 구호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반면에 사회부 제주분실에서는 전쟁피난민들의 구호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또한 구호물자가 제주항에 도착하면 사회부는 빨리 운송 보관하여 피난민들에게 신속히 배급하도록 재촉하였지만 제주도는 직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제때에 구호업무를 처리할 수 없어 마찰이 잦았다. 이 때문에 제주도에서는 피난민에 대한 구호업무를 놓고 사회부 분실이 이래라 저래라 지시하는 것을 늘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구호업무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고 있을 때었던 1951년 5월 어느날 제주시내 某 실업인의 집에 묵고 있는 신성모(申性模) 前국방부장관이 최 분실장을 급히 찾았다. 최승만과 신 前장관은 그때 초면이었다.

최승만, "정치에 뜻이 없소"…도지사 제의 거절

신 前장관은 최 실장이 찾아가자 그때까지 얘기를 나누고 있던 손님들을 모두 물리쳤다. 그 자리에서 최승만은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신 前장관은 나직한 목소리로 "나는 대통령의 특사로 제주도의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내려왔으며, 3~4일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여론을 듣고 있다"면서 "최 분실장이 차기 제주도지사를 맡아 달라"고 말하고 "나는 돌아가는 대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할 예정인데 그러면 절대로 거절하면 안 된다"고 다짐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최승만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다.
첫째, 자신은 정치적인 일에 관심이 없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싶을 뿐이며 둘째, 지금과 같은 공무원 봉급으로는 생활이 곤란해서 부정을 저지르기 쉽고 셋째, 아내가 납북된 후 혼자가 되어 내조 없이 큰 일을 맡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신 前장관의 제의를 사양했다.

이에 대해 신 前장관은 "다른 사람들은 도지사나 경찰국장이 되기 위해서 엄청난 돈을 쓰고 있는 실정인데 당신은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사람이다"면서 어쨌든 자신의 제안을 거절하지 말 것을 거듭 말하고 최승만과 헤어졌다.

최승만은 이 같은 사실을 당시 제주에 피난와 있던 연희대학교 홍승국(洪承國) 교수와 미군정청때 문교부에서 같이 근무한 적이 있었던 길성운(吉聖運·후에 제주도총무국장과 제7대 제주도지사 역임)과 상의했더니 그들은 한결같이 모두 좋은 일이라고 적극 권유했다.

그럼에도 최승만은 6.25 사변이 끝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던 7월 하순의 어느 날 오후7시쯤, 최승만이 묵고 있는 집 앞에 짚 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멈추는 것이었다.

육군 제1훈련소 빈(賓) 참모장이었다. 빈 참모장은 이기붕 국방부장관의 명령을 받고 왔다면서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곧 부산으로 오시도록 하라는 말씀을 전하러 왔다고 했다. 빈 참모장은 내일 아침 일찍 짚 차를 보낼 테니 타고 오시면 비행기편으로 갈 수 있도록 준비해두겠다는 말도 전했다.

친구인 이기붕 국방장관 "도지사로 임명되니 그렇게 알라"

최승만은 두 달 전에 신 前장관이 했던 말이 생각났으나 아니 갈 수도 없었다.

최승만과 이 국방장관과는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그들은 어릴 때 서울 사직동 도정궁(都正宮) 근처에 같이 자랐으며 집안끼리도 매우 가까웠다. 또 보성중학교 시절에는 같은 반이었을 정도로 친근한데다 최승만이 미국 유학시절에는 함께 공부했던 사이였다. 또한 이 국방장관이 朴마리아와 결혼할 때에는 화신백화점 사장 최남(崔楠· 보성중학교 출신)과 함께 들러리를 서기도 했다.

최승만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국방부에 전화를 걸었더니 이 장관이 출장차 대구에 급히 갔다는 얘기를 듣고 하룻밤을 지낸 뒤 부산 초량동에 있는 허정(許政) 사회부장관을 찾아갔다. 허 장관은 최승만의 방문 이유를 밝히기도 전에 "최 분실장이 제주도지사로 임명되니 그렇게 알라"고 말했다.

최승만은 출장에서 돌아온 이 국방부장관을 만난 것은 며칠 뒤였다. 부산 대한통운사장 임봉순(任鳳淳)의 집에 묵고 있던 최승만은 아침 일찍 이 장관의 갑작스런 방문을 받았다.

이 장관은 매우 바쁘다면서 현관에 선 채로 "아무 소리 말고 제주도지사를 맡아라"는 것이었다. 최승만은 두 달 전에 신 前장관에게 밝혔던 똑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제주도지사 임명을 거절했다.

다음날 이 장관은 다시 최승만을 찾아와 자신과 함께 꼭 가봐야 할 곳이 있다면서 어느 2층 집으로 데려갔다. 문 앞에는 무장 경찰관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 장관은 여기가 바로 이승만 대통령의 집무실이라고 소개하고 그를 대통령에게 안내했다. 그러면서 절대 지사발령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 당부했다.

최승만(54)이 그렇게 해서 제6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한 날은 1951년 8월4일이었다.
당시 제주도내 관가와 사회는 최 지사가 사회부 제주분실장과 연희대학교 교수였다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었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경력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최 지사는 1897년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태어나 보성중학교와 일본 동경관립외국어학교 러시아과에 입학했다. 유학시절에는 문예잡지 '창조(創造)'誌 동인으로 활동하다가 동경유학생들의 '2.8 독립운동'에 연루돼 학교를 중퇴하고 재일(在日) 조선YMCA의 월간잡지 '현대'주간과 일본 동양대학을 졸업했다.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최승만은 1930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대학을 졸업하고 1939년 김성수(金性洙)에 의해 동아일보 잡지부장으로 발탁됐으나 2년 후 '신동아' 주필 시절 손기정(孫基禎) 마라톤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강제 퇴직된 뒤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문교부 교화국장을 거쳐 연희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최승만은 이화여자대학교 출신이며 사회부녀국장을 지낸 부인 박충애(朴忠愛· 일명 朴承浩)와 결혼하여 네 딸을 두었으나 부인과 세 딸이 6.25 사변 때에 북한으로 납치되는 불운을 겪었다. 지사 부임시에는 막내 딸 박미성(朴美星)만을 데리고 왔다.

최 지사는 도정방침을 '공명정대, 청렴결백, 민폐일소, 공비소탕, 산업개발, 전시新생활운동전개'등에 두고 서정쇄신과 난민구호에 도정을 집중시켜 나겠다고 밝혔다. 특히 최 지사는 전쟁으로 입도한 피난민 10여만명에 대한 구호문제와 서울에서 공수돼온 고아 1000여명에 대한 양육, 4.3사건으로 피폐된 제주도민들의 구호와 복구 및 중산간 부락의 재건문제에 역점을 두었다.

<김종배의 도백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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