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배의 도백열전(15)]제6대 제주도지사 최승만③

제주도민들의 대학설립운동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인 1951년 11월12일 김차봉 제주읍장이 제의한 제주읍의 시(市) 승격에 대한 진정서가 정부와 국회에 동시에 제출됐다. 김 읍장은 한 해전에 선출된 제주출신 제2대 국회의원 김인선과 강창용 강경옥 등이 귀향활동으로 개최한 '제주읍 지방발전좌담회'에서 이 문제를 정식으로 제안함으로써 제주읍에 대한 시 승격문제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김 읍장은 "지방자치법에 의하면 시 승격의 조건은 인구 5만명 이상이면 가능한데도 제주읍은 인구가 8만이 넘고 있는데다 도청 소재지인데도 아직껏 시로 승격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그동안의 급속한 성장에 비추어 제주읍의 시 승격은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주읍내 각 기관단체 대표 및 주민들이 모인 이날 좌담회에서 세 국회의원은 제주읍의 시 승격을 적극 추진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참석자들은 모두 김 읍장의 제의에 동의했다. 이에 따라 김 읍장은 시 승격에 필요한 기초조사와 서류구비에 착수하면서 제주시 승격의 필요성을 역설한 진정서를 작성하여 김재천 제주지방법원장을 포함한 도내 각 기관장·사회단체장·정당·지역유지 등 81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아냈다.

근무시간에 술 취한 공무원 파면 조치

최 지사는 도정의 현안사업으로 대두된 제주대학설립 및 제주읍의 시 승격문제와 피난민구호사업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직원들의 공직기강을 바로 세워나갔다.

최 지사는 여전히 밀려드는 피난민들에 의해 제주사회는 물론 공직사회의 기강이 크게 해이하여 대낮에도 술을 마신 붉은 얼굴로 태연히 업무를 보고 있는 직원들을 보고 공직자세부터 바로 잡아 나가기로 했다. 최 지사는 술에 취한 채 근무하는 일은 신성한 공무를 해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민원인들이 보기에도 좋지 않다고 여겼다.

어느 날 대낮 근무 중임에도 술에 취한 직원 3명이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당장 지사실로 올라오도록 했다. 그중 한 사람은 국가공무원인 제주도민이었고, 두 사람은 지방공무원인 피난민 출신이었다. 그런데 제주출신 공무원은 최 지사가 평소 아끼던 직원이었다.

그러나 최 지사는 일벌백계 차원에서 지방공무원인 피난민을 모두 파면한데 이어 국가 공무원인 제주출신은 인사위원회에 회부했다. 지방공무원에 대한 인사권은 도지사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 지사는 내심 그들의 생계를 생각하여 경고 또는 훈계로 다스리려고 했으나 다른 직원들에 대한 영향을 감안하여 단호히 조치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는 대낮에 술을 먹고 근무하는 일이 좀체 보기 힘들었다.

그런가 하면 당시 제주도에는 군인들이 타고 다니는 짚 차는 많았으나 승용차라고는 오직 도지사가 타고 다니는 자주색 승용차 한 대뿐이었다. 그래서 지역유지와 기관장들이 결혼식에 쓴다고 차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최 지사는 국가가 도지사의 공무를 위해 내준 도지사 전용차를 개인의 결혼식에 자주 빌려가고 있는 점을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도지사 운전기사가 경찰국의 전화를 받고 "경찰국에서 경찰국장의 부하에게 경사스런 일이 생겨서 차를 좀 빌려달라고 한다"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최 지사는 "도지사 전용차는 공용이지 사용(私用)이 아니므로 아무리 경찰국장의 부하가 결혼을 한다하더라도 빌려줄 수 없다고 하라"고 야단을 치며 돌려보냈다.

또 그때에는 피난민 구호문제로 제주도를 방문하는 내외국인 인사가 많았다. 그들을 영접하고 대접하는 것이 도지사의 주요 일과이자 업무였으나 최 지사의 개인적으로는 무척 고역이었다.

외국인은 주로 UN의 CAC에서 맡았지만 장관급 이상, 소위 귀빈이란 사람들은 읍내에 묵을 만한 숙소나 여관이 없어서 으레 도지사관사에서 묵었다. 따라서 빈약한 제주도의 재정으로서는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녁 만찬까지 치러할 경우에는 재정부담이 상당히 컸다.

최 지사는 궁리 끝에 만찬회 대신에 지사 관사의 넓은 뜰을 이용해서 다과회를 열어 손님들을 대접했다. 다과회는 한국보육원 황온순원장의 지원을 받았다. 황 원장은 평소 최 지사가 보육원에 보여준 후의에 보답한다는 뜻에서 다과회가 있을 때마다 테이블과 의자, 간단한 다과 등을 보냈으며 고아원 원아 60~70명으로 구성된 악대를 보내 분위기를 돋워 주었다.

한국보육원의 악대는 최 지사와 미국인 길버트(Gilbert)에 의해 조직됐다. UNCAC파견관으로 제주도에 와있던 길버트(제주도KCAC 부사령관. 소령)가 최 지사를 예방했을 때 "제 취미는 음악을 지휘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돼 한국보육원 악대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길버트는 최 지사의 주선으로 먼저 한국보육원 악대를 조직한 데 이어 오현고, 제주농고, 제주중학교 악대와 경찰악대를 창설시켰다. 악기와 악보도 모두 길버트에 의해 마련됐다. 그 중에서도 한국보육원의 악대가 인원이나 악기 종류에 있어서 가장 규모가 컸으며 12세부터 17세까지의 남녀 원생으로 구성됐다.

1953년 7월20일 길버트가 임기를 마치고 제주를 떠났을 때에는 길버트 송별 음악회 및 환송회가 관덕정앞 광장에서 성대히 개최돼 많은 도민들의 심금을 울렸다. 송별 음악회에는 최 지사를 비롯하여 도내 각 기관장과 단체장, 학교장, 주민, 학생, 한국보육원생들이 나왔다. 최 지사는 떠나는 길버트에게 도민들을 대신해서 감사장을 주고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밤 늦게까지 개최된 송별 음악회는 길버트가 재임시에 조직한 5개 악대의 연합연주가 한 여름밤을 수놓아 도민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았으며 오현고등학교에서는 '버트음악관'이 세워져 그의 업적을 높이 기리기도 했다.

징집영장 나온 수행비서, 주변건의 불구 전장으로 보내

한편 성품이 강직하기로 소문난 최 지사는 자기 주변관리에도 철저했다.
최 지사는 부임 후 며칠이 지날 때까지도 비서를 두지 않고 있다가 제주에 피난 와 있던 연희대학교 학생 김태환(金泰煥)을 비서로 채용했다. 김태환은 최 지사의 의중을 잘 읽어 일 처리가 깔끔했다. 그러나 몇 달되지 않아 김 비서에게 징집 영장이 나와 그만 두어야할 입장이었다.

주위에서는 "아까운 인재라면 도지사가 제주지구 병사구사령관에게 말씀 한 마디만 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면서 최 지사에게 알려주었으나 최 지사는 끝내 "법은 만민 앞에 평등한 것이며, 도지사라고 함부로 어길 수 없다"면서 김 비서를 전장으로 내보냈다.

그 후에 채용한 비서가 안병국(安炳國)이었다. 안병국 역시 피난민으로서 제주에 와 있다가 주변의 소개로 임명됐다. 안병국은 최 지사와 같은 기독교 신자이면서 머리회전이 빨라 최 지사의 사사로운 일까지 곧잘 해결하는 등 지사 보좌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최 지사는 어느 날 그 동안 초도순시를 하지 못했던 추자면을 순시하기로 하고 안병국 비서를 데리고 추자로 떠났다. 오후3시 소형어선을 빌려 순시에 나선 최 지사는 8시간만인 밤 11시가 돼서야 추자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추자교회는 기독교 신자인 도지사가 왔다하여 강론을 요청해왔다. 최 지사는 오랜 항해로 몹시 피곤한데다 도지사가 공무 이외의 일을 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안병국 비서가 대신 강론을 하는 등 언변과 행동이 민첩했다.

그러나 안병국도 몇 달되지 않아 행정을 외부에 누설시켰다는 사소한 이유로 전격 파면조치함으로써 도청 직원들을 놀라게 했다. 이처럼 최 지사는 아무리 자기가 아끼는 부하일지라도 특혜를 조금도 인정치 않았다.

그때 제주도에는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학교가 크게 부족한 실정인데도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고 있었다. 최 지사는 그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문맹자를 없애기 위해서도 정원(定員)에 구애됨이 없이 배우고자 하는 어린이들이라면 모두 수용하도록 학교에 지시했다. 그러나 교장들은 문교부 지시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곤란하다며 난색을 표했다.

최 지사는 자신이 책임질 터이니 걱정 말라고 교장들을 안심시켰다. 최 지사는 백낙준(白樂濬) 문교부장관과는 평소 잘 아는 사이여서 다음 부산출장 기회 때에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그 문제는 문교부 보통교육국 소관이었다. 최 지사는 박희병(朴熙秉) 국장을 찾아 하루빨리 제주도민들의 문맹을 퇴치하기 위해서라도 정원에 관계없이 어린이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한 뒤, 또 이미 그렇게 일선학교에 지시해버렸으니 박 국장이 이해해달라고 말했다. 박 국장은 어이가 없는 듯 "도지사가 그러면 되시겠습니까"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그 일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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