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목장을 만나 제주 중산간마을 번성하다
몽골 목장을 만나 제주 중산간마을 번성하다
  • 김일우·문소연 (-)
  • 승인 2011.04.2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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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몽골을 만나다] 산촌이 형성되다

몽골과의 만남에서 비롯된 목축업의 발달은 제주 중산간 지대의 마을 형성을 가속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제주에는 선사시대부터 해안지대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려 전기에도 제주의 농업생산력은 농경만으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기 때문에 제주사람들은 농경지와 바다를 오가며 반농반어 형태의 생업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농경에 적합한 토양과 수원도 해안지대에 집중되어 분포하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제주에는 고려 전기까지만 해도 해안과 멀리 떨어진 산촌이 거의 없었던 편이었지요. 그러다 휴한농작법이 실시되는 등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농경지가 중산간 지대로 서서히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제주 중산간 지대의 마을은 대체적으로 14세기 초 무렵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탐라목장이 몽골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중 하나로 간주될 만큼 목축이 번성하던 때였습니다.

농경이 발전하고 확대되는 추세에 몽골로 인한 목축업의 성장과 인구유입이 맞물리면서 산촌 형성이 가속화되어나간 셈이지요.

이로써 제주의 마을은 주민들의 생업활동이 반농반어 형태를 띠는 해촌과, 반농반목 형태를 띠는 산촌으로 크게 나누어지게 됩니다.

<관련유적 돌아보기>

▲ 대수산봉 성산읍 고성리 ⓒ김일우·문소연

▲ 대수산봉 일대 ⓒ김일우·문소연

대수산봉에서 바라보는
제주목마장 발상지, 수산평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로 가서, 마을에서는 ‘큰물메’라 부르는 대수산봉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대수산봉은 높이 100m쯤 되는 제법 가파른 오름이지만 산책로가 잘 마련돼 있어 가볍게 오를 만합니다. 예전에는 매끈하고 기름진 초지였다는데, 지금은 소나무가 빽빽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오름의 본디 이름은 ‘물메’, 이름처럼 샘솟는 못이 있었는데 호종단이 제주섬 수맥의 기운을 누르러 왔을 때 그 수맥도 끊어버려 물이 그쳐버렸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근처에 물메라는 오름이 하나 더 있어 그곳은 ‘작은물메[소수산봉]’, 이곳은 ‘큰물메[대수산봉]’가 됐습니다.

오름 정상에 두두룩한 마루터기가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설치했던 군사통신 시설인 봉수의 흔적이지요. 이곳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노라면 감탄사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제주섬 동부지역은 물론 저 먼 바다까지의 광활한 대자연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 수산평 일대의 퐁낭못 ⓒ김일우·문소연

대수산봉을 중심으로 펼쳐진 광활한 지대가 수산평입니다. 1276년(충렬왕 2), 당시 탐라 관부의 최고책임자 ‘다루가치’로 부임해온 탑랄적塔剌赤이 몽골에서 몽골말 160마리를 가지고 와 풀어 기르면서 시작된 제주 목마장의 발상지이지요. 다음해에 목마장은 서쪽의 한경면 고산리 일대로 확대됩니다. 이들 목마장에는 말뿐만 아니라 낙타, 소, 양, 나귀, 고라니 등도 함께 놓아길렀다고 합니다. 말이 특히 잘 번식되자 몽골은 계속 말을 들여왔습니다. 충렬왕 26년(1300)에는 몽골 황태후 마구간 말도 방목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때 탐라목마장은 동·서 아막阿幕으로 일컬어집니다. 이때쯤에 이미 몽골의 14개 국립목장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지요. / 김일우·문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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